몇 년 전 겨울 IMF 사태가 터졌을 때 사회는 바짝 얼어붙었지만 심장내과는 '때를 만난 듯' 무척 바빴다.스트레스로 인한 심장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심근경색 환자는 발병 즉시 막힌 혈관을 풍선과 금속망으로 뚫는 시술을 해야 해 주말에도 밤낮으로 호출당했던 기억이 있다.
심장병과 돌연사가 스트레스와 관련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직접 실감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환자는 40∼50대였으나 30대도 더러 있었고, 평소에 가슴통증이 없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 주된 원인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흥분과 과다한 흡연. 특히 직장에서 해고된 사람보다 해고를 당하기 직전에 있던 사람들이 심장혈관이 막히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응급실로 많이 실려왔다.
어느 날 30대 중반의 외국인이 응급실에 실려 왔다. 얼굴은 혈압이 떨어져 노랗게 변했고 식은 땀을 흘리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심전도를 측정해 보니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진단돼 곧바로 혈관확장 시술을 시행해 환자는 극적으로 소생했다. 이 환자는 방글라데시에서 직장을 구하러 온 불법 체류자였는데 한국에 입국한 지 일주일 만에 IMF 사태가 터지자 막노동할 자리마저 구하지못해 친구 자취방에서 두 달 동안 상심해 담배만 피웠다고 한다.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가려 해도 여비가 없었다. 결국 스트레스만 쌓이자 평소 한갑 피던 담배를 두세갑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심장혈관이 막혀버린 것이다. 금속망 시술 후 대개 이틀 정도 지나면 퇴원해 집에서 아스피린 한 알만 먹으면 되지만 이 환자는 퇴원할 수가 없었다.
의료보험도 없어 수백만원이나 되는 입원비는 이 환자의 또 다른 걱정거리가 됐다. 퇴원도 하지 못하고 병원서 눈물만 흘리던 그는 입원 8일째 아침에는 입원실에서 볼 수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밤에 탈출한 것이다. 고마웠다는 인사말과 함께 '아스피린을 구해서 먹겠다'는 영어로 쓴 편지를 남겨 두고서…. 뒤에 들은 얘기는 고향으로 잘 돌아갔다고 한다.
이 환자의 심장혈관은 협착이 별로 심하지 않았지만, 흡연으로 인해 심하지 않던 동맥경화 부위가 파열되면서 바로 피떡(혈전)이 커져 혈관을 막아버린 것이다.
때로는 단 한 개비의 담배가 이런 긴급한 상황을 유발할 수 있다. 담배가 혈관에 나쁘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라 진실이다. 지금도 담배 한 모금을 빨면서 생명과 도박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것이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려대 구로병원 순환기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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