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독일 점령군으로부터 해방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15일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이 자살했다. 52세였다. 처음 자살을 시도한 것이 일곱 살 때였다는 그 자신의 회고를 믿자면, 드리외라로셸의 이 자살 시도는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였다. 그리고 앞의 두 번과 달리 이번에는 성공했다. 자살에 성공하지 않았더라도, 이내 그는 드골이 주도한 숙청 재판에서 사형이나 종신형을 선고 받았을 터이다. 드리외라로셸이라는 이름은 전쟁 기간 중 독일 점령군에게 협력한 파시스트 문인 리스트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점령군의 뜻에 따라 당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예지 '신프랑스평론(NRF)'의 주간을 맡아 지식인 사회의 대독(對獨) 협력을 주도했다.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생을 마감한 이 작가의 부모는 노르망디 지방의 유서 깊은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었다. 역시 그의 회고를 믿자면, 드리외라로셸은 자신이 10세기 초 그 지방에 정착한 바이킹족(노르만족)의 후예라고 상상했고, 거기서 그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적 세계관이 배태됐다. 대부분의 적극적 협력자들과 마찬가지로, 드리외라로셸도 자신이 반유대주의자라는 것을 주저 없이 공언했다.
그러나 청년기 이후 드리외라로셸의 글과 삶이 일관되게 파시즘에 이끌린 것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베르댕 전투에 참가해 부상을 입고 제대한 그는 종전 뒤 불과 얼음의 관계라 할 다다이즘과 극우 민족주의에 동시에 발을 들여놓았고,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에는 스탈린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자전적 소설이라 할 '질'(1939)에서 모든 형태의 참여를 쓸데없는 짓이라고 진단했던 그가 동시에 파시즘에 열광한 것도 기묘하다. 이런 변덕과 모순은 한국의 유사 파시스트 지식인들에게서도 흔히 관찰되는 바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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