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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이가 고른 책]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 지음·문학과지성사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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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이가 고른 책]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 지음·문학과지성사 발행

입력
2004.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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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등단작품이 곧 대표작인 경우가 있다. 기형도의 '안개', 안도연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박라연의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그렇다. 그나마 가수 김정구 선생은 '눈물 젖은 두만강' 한 곡으로 평생을 먹고 살았지만, 등단작품이자 대표작 덕분에 평생을 먹고 사는 시인은 불행하게도 거의 없다.시인과 소설가가 술판을 벌이는 곳에 가면 누가 소설가인지, 누가 시인인지 금방 식별할 수 있다. 안주를 먹는 사람은 소설가고, 술을 마시는 사람은 시인이다. 어떻게 잡은 공술의 기회인데 안주 먹고 있을 한가함이 있겠는가. 이 자리에서 한 권의 시집을 권하는 이유는 이 코너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 '가난에 굶주리는 시'를 권할 이 없을 것 같은 마음에서다.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 그 중 하나를 '모방'이라고 하였다. 모방이란 '어릴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모방을 잘 한다는 것이며 지식 또한 모방에 의해 습득된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형도에 반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복잡하게 '시학'의 구절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그는 '모방의 형식'과 '쾌감의 절정'을 제대로 알고 느끼며 표현한 몇 안 되는 시인이다. 더욱 다행한 것은 그의 이런 능력이 부패하고 변절되기 전에 일찍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세상에 단 한 권의 시집(물론 자의로 낸 것은 아니지만)을 남긴 시인이다. 시인이 한 권의 대표작에서 더 토할 수 없는 쾌감을 누렸으니 더 살아서 뭘 하겠는가.

부패하고 무질서한 참담한 상황들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복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오늘의 모습을 기형도는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믿었던 사람이고, 그 믿음이 언젠가 자신을 부를 것이며, 그러므로 기꺼이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사람이다. 가장 치열한 삶을 살다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기고 자연으로 돌아간 젊은 시객에게 이 짧은 졸고를 바친다.

/이홍·더난출판사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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