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책/유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책/유산

입력
2004.03.13 00:00
0 0

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옮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라는 이름은 종종 여성 해방과 같은 의미로 읽힌다. 그의 소설은 당시 남성 작가들이 구사해온 전통적인 '이야기'의 작법에서 벗어나 내면의식의 변화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것이었으며, 그 중 몇몇 작품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를 주제로 삼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울프 소설의 주제를 '여성이란 무엇인가'로만 가두는 것은 온당한 평가가 아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의미를 일깨웠다.

버지니아 울프 전집이 발간되고 있다. 각 대학 영문학 교수들이 모여 2003년 출범시킨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에서 번역을 맡아 '등대로' '댈러웨이 부인' 등 장편 5편을 냈으며, 단편집 두 권을 완간했다. '불가사의한 V양 사건'에 이어 이번에 출간된 단편집 '유산'에는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단편소설 23편이 실렸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단편은 종종 장편이나 에세이에서 더욱 발전시켜 나간 테크닉의 실험장이었다. 그의 단편들은 장편에 비해 유머가 더 풍부하고, 분위기도 밝으며, 삶에 대한 강한 의지까지 드러나 있다." 번역자들의 설명이다.

비극적인 남녀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매우 경쾌하게 진행되는 표제작 '유산'이 대표적이다. 아내가 죽은 뒤 남편은 아내의 유산인 일기장을 본다. 정치가의 아내 역할을 충실하게 했지만 자아 실현의 욕구를 억누를 수 없어 빈민 봉사활동에 뛰어든 여자는 그곳에서 하류층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아내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죽은 연인을 따라 자살한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된 남편은 비명을 지른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생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소설은 울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널리 읽히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인생에서 날카롭게 포착된 한 순간의 진실은 울프 단편의 탁월한 성과다. 유명한 장편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댈러웨이 부인이 등장하는 단편 '만남과 헤어짐' '하나의 요약' 등이 그렇다. 댈러웨이 부인이 연 파티가 무대가 된 이 작품들은 사소한 듯 보이는 사건과 짧은 성찰이 인생을 어떻게 흔들어놓는지를 보여준다. '만남과 헤어짐'에서 파티에 초대받은 중년의 독신녀 루스 애닝은 시인 로데릭 셜을 만나 잠깐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이 제각기 다녀왔던 캔터베리가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고, 그들은 그때의 추억에 빠져든다. 한 도시에 대해 교감을 느끼면서도, 일상이 뒤흔들릴까 두려워 내면을 열기를 망설이는 짧은 순간을 작가 자신은 '존재의 순간들'이라고 불렀다. 화려한 파티에서 무관심하고 냉정한 도시 런던의 본질을 본 래덤 부인의 이야기 '하나의 요약' 또한 그런 순간들을 붙잡아낸 것이다.

울프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씌어지지 않은 소설'은 흥미롭다. 한 소설가가 기차에서 만난 나이든 여자를 관찰한다. 소설가는 여자에게 미니 마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의 삶을 안타깝고 비극적인 것으로 상상하기 시작한다. 창의 얼룩을 닦고 어깨를 움직이는 여자의 모든 행위가 막막하고 쓸쓸한 삶의 반추다. "세상 가장자리의 삶에 얽매여, 가엾은 미니 마시에게는 어떤 죄도, 슬픔도, 광시곡도, 미친 짓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차가 역에 닿고 여인이 마중나온 아들을 만나 행복하게 떠나는 실제 모습을 보면서 작가의 상상은 뒤집힌다. 멋지게 배반당한 현실에 소설가는 삶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수수께끼 같은 모습! 어머니와 아들. 오 그것은 어떻게 소용돌이 치고 출렁거리는지―나를 새롭게 떠다니게 하는지!" 상상을 뛰어넘는 실제의 삶은 얼마나 멋진 것인지. 버지니아 울프가 알려주는 것은 진짜 인생의 가치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