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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탄핵, 그리고 말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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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탄핵, 그리고 말의 비극

입력
2004.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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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는 어미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뜁니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기고 걷고 뛰기까지 많은 세월과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송아지는 그렇게 태어나 먹고 살다 죽기까지 더 배우고 익히는 것이 거의 없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다릅니다.몸이 자라는 것은 송아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할지라도 사람은 말을 배워갑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옹알이를 하다가 차츰 단어들이 튀어나오고, 그러다 문장을 엮어 발언을 하게 됩니다. 부모 된 사람은 누구나 자식이 갓난아기였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다듬어진 문장으로 발언하던 때의 감격과 환희를 잊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제 막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 된 자식과의 첫 만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고 보면 말은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인 징표가 바로 그 '말할 수 있음'에 있습니다. 말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 소통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몸짓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어만큼 효과적으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말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툭 터진 만남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말은 삶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서로 주고받는 언어를 통해 나는 내 울안에 나를 가두어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겪는 최초의 '자유'일는지도 모릅니다. 언어는 나를 새로운 삶의 지평에 서게 합니다.

인류의 문화는 인간이 얼마나 언어를 중요한 것으로 여겨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신이 인간과 세상을 언어로 창조했다는 신화도 그러하고,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철학자의 주장도 그러합니다. 말이 사물을 있게 했고, 사물은 말 안에서 비로소 자리를 잡는다고 하는 주장들입니다. 사람다움과 잇대어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저 소리가 아닙니다. 말 이전에 말을 말이게 한 생각이 있습니다. 말이 사물을 있게 한다할지라도 그 말을 낳는 것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생각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으면 말이 없습니다.

말은 그것 자체로 완결적이거나 힘을 갖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 말의 발언주체가 지닌 생각이 담겨야 비로소 말은 말이 됩니다. 물론 그렇게 발언된 말이 가 닿거나 되돌아와 사람의 생각을 틀 짓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순환의 끊임없는 연쇄를 승인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말의 출산은 그 말을 발언한 주체의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들어보면 우리는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는 그 발언주체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가벼운 말은 그 생각의 천박함을, 조심스러운 말은 그 생각의 진지함을, 교묘하게 꾸민 말은 그 생각이 그렇게 잔꾀로 꼬이고 얽혀 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수사학을 배우고 논리를 익힌다 해서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조심을 한다고 해서 발언주체의 모습이 그의 언어 뒤에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언어를 다듬고 말을 조심하고 말할 때와 자리를 살펴 발언한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발언은 그 발언주체 이상일 수도 이하일 수도 없습니다. 물론 거짓말도 있습니다. 뜻이 잘못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듣는 이의 분별력과 이해가 요청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발언주체가 자신의 발언에서 면책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기를 우리는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우리는 자라 사람이 되어 사람구실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생각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말을 낳기 때문입니다. 자칫 우리는 말을 잘못 배워 송아지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정 진 홍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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