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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스티프

입력
2004.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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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로취 지음·권 루시안 옮김 파라북스 발행·1만4,500원

죽은 자는 용감했다.

의학 공부를 막 시작한 학생들이 잡은 칼에 기꺼이 몸을 맡기고, 높은 건물에서도 몸을 내던졌으며, 자동차에 올라 타 건물벽과 정면충돌하기도 한다. 오로지 살아있는 사람들의 안전과 생명 연장을 위해서다. '스티프'(원제 'Stiff')는 이처럼 사자(死者)들의 괄목할 만한 업적을 하나씩 거론하고 있다. 스티프는 딱딱한 상태, 사후 경직이 일어났다는 의미에서 시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신들이 의료계에 기여한 큰 공헌은 뭐니뭐니해도 해부다. 인체를 처음으로 해부한 의사는 기원전 300년 이집트의 헤로필루스였다. 인체의 기능을 알아내기 위해 죽은 사람을 해부하도록 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방침에 따라 그는 시체는 물론, 600명의 죄수를 산 채로 해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해부는 죽음보다 더한 처벌로 생각될 만큼 꺼려졌다.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도 "잔인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불쾌하다"며 해부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힘줄을 신경이라 지칭하고, 두뇌는 점액을 분비하는 기관이라고 믿었다.

19세기까지 영국에서도 돼지 한 마리를 해치면 교수형이지만 사람을 죽이면 교수형 후에 해부형이 추가됐다. 1836년 해부법이 통과된 후에도 묘지를 파헤쳐 시신을 꺼내 팔거나, 일부 의사들은 가족을 대상으로 칼을 댔다. 17세기 외과의사인 윌리엄 하비는 아버지와 누이를 해부하여 순환계통을 발견할 수 있었다. 1990년대까지 콜롬비아에서는 해부용 사체를 확보하려고 빈민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시신은 특히 차량의 안전장치 개발을 위한 교통사고 충돌실험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정면 혹은 측면 충돌시 인체의 각 부위가 어디까지 충격을 견뎌낼 수 있는지를 확인해주었다.

이러한 실험결과 후 안전띠나 에어백 등이 개발됐으며 시속 100㎞의 속도로 충돌해도 안전한 장치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차량 안전장치 덕분에 1987년 이후 매년 8,500명이 생명을 구한 것으로 추산된다.

뿐만 아니다. 총탄의 인체 관통과 방탄복 실험에도 사체는 유용하다. 189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새로운 총기가 개발될 때마다 유효사거리를 측정하는데 동원됐고, 탄도학 및 방탄복 연구팀은 가벼우면서도 효과적인 표준방탄복을 만들어냈다.

시신은 또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왕복선에도 탑승했고, 심장이식에서 성전환수술에 이르기까지 자리를 지켰으며 항공기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현장에도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사형자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기요틴(단두대)의 등장을 계기로 엽기적인 실험도 당했다.

과연 인간의 영혼은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고통은 어떻게 의식되는가? 시신 실험에서 몸과 분리된 머리는 10∼12초 뒤에 인사불성이 되지만, 혈액 공급이 지속되는 동안 머리는 생각하고 듣고 보고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저자 메리 로취는 미국에서 과학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44세의 여성. 여행 기자로 남극을 세 번이나 여행한 후 다시 '주검의 위대함'을 찾아 나섰다는 그는 책을 쓰기 위해 해부실습과정을 지켜보고, 인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직접 관찰했다. 또 죽은 운전자의 엉덩이 살을 베어내 찜의 재료로 쓴다는 로이터 통신의 기사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 하이난 섬도 여행했다.

끔찍하고 무서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 책에 담긴 내용이 그다지 혐오스럽지 않은 것은 익살맞고 통통 튀는 문장 덕분이다.

저자는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사후 여행을 떠난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해부 실험실 사체보다는 전신 골격 견본이 되고 싶다. 쭈그러든 내 살을 젊은 학생들이 바라보는 광경은 끔찍하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 시체 다룬 도서는

시체 문제를 다룬 일반 도서는 드물다. 국내에서 출판된 것으로는 '한국의 시체, 일본의 사체'(해바라기 발행)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대표적 법의학자 문국진씨와 일본의 원로 법의학자이며 작가인 우에노 마사히코(上野正彦)의 대담을 통해 양국의 죽음과 장례문화, 주검에 대해 갖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시각 차이 등을 다루었다.

'스티프'의 저자는 얀 본데손의 '생매장(Buried Alive)'을 권한다. 영국 작가이며 역사학자인 본데손은 관 안에 남아있는 긁힌 자국에 대한 온갖 추측을 파헤치고, 청진기와 뇌파 기록기 등이 없던 시절에 사망 확인을 위해 사용됐던 도구들에 대한 이야기도 풀어놓았다. 당시에는 젖꼭지 족집게, 혓바닥 당기개 같은 것으로 사망 여부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크리스틴 퀴글리의 '시체, 그 역사(Corpse: A History)'도 추천한다. 문화권에 따라 다른 시신 처리 절차와 방법, 의식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미라 만드는 방법과 식인 풍습 등에 대해서도 다뤘다. 두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최진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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