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 대한 탄핵결의안이 가결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국회는 어제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야당이 발의한 탄핵결의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켜 노무현 대통령의 모든 권한이 정지됨으로써 앞으로의 국정은 고건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체제가 맡게 됐다.이제 노 대통령이나 여야 정치권은 물론, 국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예상되는 혼란을 최소화하는 노력에 적극 참여해야 할 줄 안다. 일찍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이 미증유의 난국도 우리 모두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슬기롭게 넘길 수 있다고 본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지 않는가.
야당이 과반수가 넘는 많은 국민들의 한결 같은 반대의사를 무시하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인 이번 사태는 앞으로 곧 있을 총선 등에서 어떤 형태로든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야는 물론, 특히 대화와 타협을 뿌리친 노 대통령의 리더십에 큰 회의를 갖게 된다. 어쨌거나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사태를 불러 온 이번사태의 1차적 책임은 노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거듭 말하지만 이번 사태는 노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다. 노 대통령은 중앙선관위의 선거법위반 논란에 대한 국민의 사과요구를 끝내 거부했다. 탄핵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큰 극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노 대통령이 한발 양보해 파국만은 막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런 기대를 외면하고 오기에 다름아닌 정면승부를 택했다. 결과는 노 대통령으로서는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탄핵안 가결을 눈 앞에 두고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허겁지겁 내놓은 대국민사과가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사는 때가 있는 법이다. 11일의 노 대통령회견이 바닥을 모를 정도로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만약 이 때라도 노 대통령이 한걸음 물러서는 모습만 보였더라도 야당의 탄핵안은 명분면에서는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탄핵안 가결사태는 노 대통령이나 그의 지지세력 열린우리당의 정치력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셈이다.
이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이뤄질 때까지 노 대통령의 모든 권한은 중지된다. 대신 고건 국무총리가 이를 대행한다. 고 총리의 책임이 막중해졌다. 대통령제 아래서 국정의 중추이자 핵인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상태는 예삿일이 아니다. 정변사태가 아니고서는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먼저 이런 과도기적 사태가 어떤 형태로든 빨리 결론이 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정치권은 물론, 헌재는 특히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헌재가 탄핵안을 심리하기 위한 기간은 최대 6개월이다. 이 기간만이라도 단축해서 과도기의 혼란상을 가급적 줄여야 한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논의하되 국가적 혼란상황을 이른 시일 내에 종료하기 위해 심리기간을 대폭 단축하자는 것이다. 더 이상의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현재 우리사회는 친노(親盧)와 반노(反盧), 극단적인 정치혐오세력까지 뒤엉켜 있다. 이런 정치적 아노미 상태가 지속되면 우리사회의 건전성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될 우려가 있다. 적대적인 대결상태의 심화는 결국 우리사회를 분열과 대립으로 양분케 한다. 특히 총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여야 정치권이 불필요한 편가르기나 대립을 부추겨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총선거를 한번 치르고 나면 많은 인명 살상사태가 발생하는 동남아 등과 같은 후진사회의 병리현상을 답습할 우려마저 있대서야 말이나 될 터인가.
이미 탄핵론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제몸에 기름을 끼얹는 노사모 회원의 분신사태나 의사당을 향해 차량을 돌진 시키고 불을 지르는 정치혐오의 극단적인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런 사회적 충돌현상을 극소화하기 위해서라도 헌재의 결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러나 우리는 헌재의 결정을 인내하면서 조용히 지켜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탄핵안의 가결이 알려지자 어제 증시는 한때 외국 투자자들의 투매현상으로 종합주가지수가 30포인트 이상 떨어지고 코스닥 지수가 연중 최저치로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정국이 불안한 곳에 누가 투자를 하려 할 것이며 정치가 불확실한 곳에서 무슨 경제적 동기가 찾아질 수 있겠는가.
아직은 국제 신용등급 기관들의 가파른 움직임이 감지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면 이들이 어떤 조치를 취할지도 예측을 불허한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도 따라가기가 벅찬 세계화, 국제화시대에 이런 정치적 혼란상이 세계에 어떻게 비쳐질까 두렵다. 다시 '포니 수준 만도 못한 민주주의'라는 조롱을 듣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권한이 정지된 '식물 대통령'과 대통령권한을 한시적으로 대행하는 총리의 권한대행체제 사이에서 공직사회는 복지부동 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 이는 '모든 이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것'이라는 경구처럼 지도체제의 이중성은 많은 혼란을 야기할 개연성도 크다. 노 대통령과 그의 권한을 잠정적으로 대행하게 될 고건 총리가 각별히 유념해야 할 사안이다.
우리는 특히 이번 탄핵안을 전후해서 정치권에 나돌고 있는 개헌안에 주목한다. 현재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연대하면 개헌도 불가능하지 않다. 어제처럼 재적 3분의 2의 위력을 발휘한다면 그렇다. 하지만 이 문제도 밀실에서의 담합이 아니라 철저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개헌안이 통과하려면 국회의석 3분의 2 찬성도 필요하지만 국민투표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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