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즐거운 이들이 중·고등학생 뿐일까. 낮 12시부터 시작되는 60분 안팎의 자유시간은 콘크리트 속에 갇혀 키보드를 두드려대며 전화와 씨름하는 직장인들의 숨통을 틔어주는 오아시스다.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즐거운 한 시간을 좀 더 재미있고 알차게 쓸 수는 없을까.맑은 하늘과 따스한 바람이 ‘어디론가 떠나라’고 등을 떠미는 계절. 하지만 밀린 일에 발목이 잡혀 감히 길 떠나기를 계획하기 쉽지않다. 이럴 때 동료들과 막간 소풍을 계획해보자. 옥상 정원, 동네 공원, 한강 둔치…. 조금만 눈을 돌리면 신문지 몇 장 깔고 소풍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편안한 장소가 도시에 가득하다.
삼성출판사와 홍보대행사 ‘에델만’의 젊은 직원들이 점심시간을 이용, 소풍을 떠났다. 준비할 때부터 웃음으로 가득한 봄나들이 현장을 살짝 엿봤다.
다 함께 준비하는 포트럭 점심
모임의 먹거리를 한꺼번에 준비할 이가 마땅치 않을 때는 다 함께 준비하고 이를 나누는 ‘포트럭(potluck) 파티’가 제격이다. 포트럭이란 원래 각자 간단한 음식을 한가지씩 준비해와 함께 즐기는 것을 뜻한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삼성출판사 마케팅부 한유경(32) 대리가 즐거운 점심시간을 위한 포트럭 소풍을 기획했다. 참가자는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젊은 직원들. 한 대리를 비롯해 김기옥(34) 대리, 김하희(31) 대리, 홍미진(28) 주임, 유성애(28)씨 등 다섯 명이다.
“세 달 전에 사무실을 옮긴 후 직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옥상에 마련된 하늘 정원이에요. 보통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이제 슬슬 물릴 때가 돼 간단한 소풍을 준비해봤죠. 날씨도 너무 좋잖아요.”
“메인 요리는 내가 준비할게요. 기옥씨는 음료수랑 테이블 커버, 수저 같은 것들을 준비해와요. 그리고 하희씨는 디저트. 뭘 가져와도 좋아요. 과일도 환영이고, 따뜻하고 향기로운 커피도 좋겠죠? 홍 주임은 샐러드랑 드레싱 정도만 싸오고, 성애씨는 요즘 일이 많으니 빵만 몇 조각 사오세요.”
소풍 당일인 8일. 화사한 햇살 덕에 모두의 마음이 밝다. 약속한대로 정확하게 낮 12시, 옥상 하늘 정원에 모인 다섯 명의 손에는 저마다 봉지가 하나씩 들려 있다.
기옥씨가 준비한 흰색 테이블 커버를 펼치고 그 위에 준비해온 것들을 차례로 펼쳐 놓는다. 한 대리가 직접 싸온 김밥과 유부초밥, 홍 주임의 샐러드 등이 차례로 선을 보인다. 유난히 봉지가 큰 김하희 대리는 바나나, 오렌지에다 휴대용 과일 제품인 돌(Dole)의 ‘후룻볼’까지 한 상자나 준비해왔다.
“난 고등학교 이후로 밖에서 점심 먹은 거 처음이에요. 갑자기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네.”홍 주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옥상에 바람 쐬러 나온 마케팅부 김진용(35) 과장이 합류한다.“이런, 나만 빼놓고 이렇게 재미있게 놀았단 말이야? 나 라면으로 점심 때우려 했는데…. 커피는 내가 살 테니까 나도 끼워주면 안될까? 이거 김밥 남겠는걸.”
사무실에서의 긴장된 분위기가 순간 풀리고 모두 학창시절 마음으로 돌아간다.
준비 없어도 OK! 깜짝 피자 소풍
매주 어김없이 찾아오는 ‘월요병’. 주말 내내 아무리 편안한 휴식을 취해도 월요일은 따분하고 피곤하기 마련이다. 홍보 대행사 에델만에 근무하는 윤헌정(30) 대리가 나른한 월요일 오전 ‘번개 소풍’을 때렸다. 메신저로 연결돼 있는 동료들에게 ‘오늘 점심 약속 없으면 근처 공원으로 소풍 가자’고 메시지를 보내니 모두들 쌍수를 들어 환영이다. 참가자는 윤 대리와 이중대(31) 과장, 유재련(26), 조연경(27), 고유나(23)씨.
음료수 하나 준비되지 않았지만 나들이 가려는 마음만 있다면 도심의 소풍은 어렵지 않은 법. 대부분의 피자 체인이나 중국집은 한강 둔치나 시내 유명 공원으로 배달을 해준다. 이날의 메뉴는 피자. 대학 시절 ‘본관 앞 잔디밭’으로 배달시켜 먹던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오전 11시 30분, R피자집으로 전화를 걸어 메뉴를 주문한다.“광화문 흥국생명 건너편에 있는 서울 역사박물관 앞 공원으로 피자 세 판이랑 콜라 1.5ℓ짜리 한 개 배달해주세요. 낮 12시쯤 박물관 앞에서 xxx_xxx_xxxx으로 전화주시면 자세한 위치를 가르쳐드릴게요.” “네, 문제 없습니다. 30분 내로 배달해드릴게요. 그런데 밖에서 드실 거면 1.5ℓ보다는 콜라 캔이 좋으실 텐데요.”
정말 배달해줄까 걱정이었는데 야외에서 시켜먹는 이들이 많은지 주문 받는 이가 오히려 챙긴다. 서울역사박물관 옆 경희궁은 점심 식사 후 자판기 커피를 들고 자주 찾던 곳으로 입장료도 없는데다 벤치가 많아서 좋다. 12시쯤 휴대폰 벨이 울리고 빨간 유니폼을 입은 젊은 배달원이 피자 세 판을 들고 등장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회용 포크까지 구비했다.
“회사에서 야근하며 시켜 먹을 때는 피자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어. 꽃샘 추위 때문에 쌀쌀한데 손 불어가며 먹으려니 더 맛있는 걸.” 이 과장의 말에 다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소위 ‘공장 얘기’라 일컫는 업무 얘기는 싹 빼고 젊은이들의 이런저런 사는 얘기와 함께 피자 세 판을 뚝딱 해치우니 벌써 12시45분. 첫 소풍 치고는 성공이다. 다음 번에는 짜장면과 탕수육에 도전해볼까.
“우리 매달 둘째 주 월요일마다 ‘소풍 데이’로 정하는 건 어때요? 삼청공원이나 광화문 ‘열린 마당’도 좋다고 하던데, 한번씩 다 가봐요.”“이왕이면 ‘캐주얼 데이’인 금요일로 해요. 움직이기 편하잖아요.” 매달 나들이 나올 생각에 오후 근무가 한결 가볍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고궁·여의도공원 등이 소풍 명소
칙칙한 건물의 회색 도시. 하지만 눈을 크게 뜨면 잠깐 나들이를 위한 명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광화문 일대에는 고즈넉한 고궁이 많다. 하지만 경희궁을 제외한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등은 음식물 반입이 되지 않으므로 식사 후 산책 코스로 만족하자. 서울 역사박물관 옆에 위치한 경희궁은 도시락을 싸가도 되고 입장료도 무료라 점심 소풍에 제격이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북악산 기슭에 있는 삼청공원에서 머리를 식히자. 소나무 잣나무 아카시아 나무 등이 우거진 작은 숲이 머리는 물론 마음까지 맑게 한다.
여의도에 위치한 여의도 공원에서도 점심시간 삼삼오오 모여 샌드위치를 먹는, 양복 입은 직장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강남 벤처타운에 근무한다면 삼성동의 선정릉을 찾아보자. 일대 초등학교 학생을 위한 단골 소풍코스이기도 한 선정릉은 복잡한 테헤란로 옆에 위치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공기가 맑고 조용하다.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공원이나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양천구 목동의 파리공원도 직장인 점심 소풍의 단골 코스다.
/김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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