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연구회는 젊은 시절 나의 초상이다. 정의와 평등, 자유와 기독교적 사랑이 넘치는 사회 건설을 표방한 이 연구회는 내가 주도적으로 결성, 운영했다. 그만큼 애정이 각별했다. 내가 회장에 선출됐고 부회장은 정희경(전 국민회의 의원) 여사가 맡았다. 서울 장안을 폐허로 만든 한국전 직후니까 1953년 여름이었다.당시 멤버들의 푸르름 넘친 얼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이교상이라는 동갑내기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 다닌 그는 나와 사상 토론을 가장 많이 그리고 치열하게 했다. 그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명화로 꼽히던 '인생유전'(원제 다락방의 사람들)의 애호가로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국 철학의 대부로 꼽힌 서울대 박종홍 교수가 아낀 제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술집 아가씨라는 이유로 부모가 반대하자 정신이 이상하게 됐고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등졌다. 1956년 여름 무렵이니 그의 나이 스물 아홉이었다. 무슨 신파극이냐고 할 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인생과 문학을 논하던 그의 열정적인 모습은 항상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조형균도 기억에 남는 친구다. 서울대 약대와 한신대를 졸업한 그는 미국에서 제지(製紙)학을 배웠다. 그는 함석헌 선생의 평생 제자가 됐다. 오직 기독교 정신으로 빈곤·독재와 싸운 그는 저술 활동과 함께 명저를 번역해왔다. 87년 봄에는 나와 함께 백재문화사라는 출판사를 만들었다. 백재(伯栽)는 장순하 시인이 만들어준 나의 아호로 알로에도 인간도 크게 재배한다는 뜻이다. 그는 함석헌 선생의 노자(老子) 강의 내용을 녹음해 400여쪽의 책 10권으로 만들고 있다. 지금은 종이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으니 전공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연구회 초대 총무 오재식 전 선명회 회장은 33년생이니 나보다 6년 후배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유신 때 16개국을 돌면서 기독교 인권운동을 했다.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의 미움을 샀고 전두환 대통령 때야 귀국할 수 있었다. 조국을 등진지 15년 만인 80년 귀국한 그는 한국기독교연합회(KNCC) 훈련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사회보호법 중 이른바 '정신병 조항' 반대운동을 막후에서 지휘했다. 이 조항은 전두환 대통령을 반대하는 세력을 정신병원에 집어넣기 위해 계획됐다. 경찰서장과 시장 군수 등의 인정서만 있으면 누구든 정신병원에 감금할 수 있게 한 게 내용의 핵심이다.
오재식은 역시 연구회 멤버였던 한양대 신경정신과의 김광일 박사에게 조항의 내용과 부당함을 설명했다. 당시 신경정신의학회 회장이던 김 박사도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2명의 감정 없이는 생사람을 정신병원에 가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안기부(현 국정원)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싸웠고 결국 이 조항은 삭제됐다.
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국군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사찰했던 사실이 폭로된 적이 있다. 사찰 기록에는 오재식에 대해 "기독교 세계에서 정부를 반대하는 세력의 브레인 격인 인물"이라고 묘사돼 있다. 보안사의 눈은 정확했다. 그는 기독교 인권운동의 말없는 연출자였다.
김광일 박사는 어느 책에서 연구회 시절을 회고하면서 " 당시'이 사회가 어떻게 돼가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본 헤퍼, 윌리엄 테플, 에밀 부르너 등의 실천신학 관련 저서를 탐독했다. 실천신학에 눈 뜬 건 김정문 선배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썼다.
연구회 멤버들은 이제 모두 고희(古希)를 넘겼다. 피 끓는 청년 시절의 열정은 가슴 깊이 간직해왔지만 가는 세월은 무심하기 짝이 없다. 자유와 평등, 기독교적 사랑이 넘치는 사회는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세대가 해결해야 할 숙제를 풀지 못한 채 후세에 넘기는 심정은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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