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 기대에 역행하는 정치권의 행태가 국민을 분노케 하고 있다. 지역구 수는 줄이고 비례대표 수는 늘리라고 했더니 이번에 오히려 지역구 수를 16석 늘리는 개악안을 통과시켰다. 특히 지난 임시국회에서는 종료 20분 전에 민주당이 특정 의원의 선거구를 사수하기 위해 수정안을 제출하여 선거법 개정을 무산시키기도 했다.진작 선거법을 확정했더라면 정치 신인들은 그나마 공정한 게임의 틀 속에서 기득권을 가진 의원들과 비교적 공정한 선거 게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불체포 특권을 내세워 부패·비리 의원을 지키기 위한 방탄 국회를 여는 행태는 여전하고, 심지어는 수감된 의원을 석방시키는 후안무치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개혁에 대한 정치권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지만 정치 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이는 동면하던 개구리가 땅 위로 올라오는 경칩에 폭설이 내렸다 하더라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민주화 이후 최초로 양김이 퇴장한 가운데 치르는 이번 선거에서 지역주의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재신임 정국, 차떼기 파동, 현역 의원 대량 구속 사태를 불러온 불법 정치자금 문제는 나라를 한동안 혼란에 빠뜨리는 비용을 치렀지만 4월 총선을 앞두고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자금 개혁에서 획기적 진전을 이룩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더구나 금품 제공을 신고할 경우 50배의 포상금을 주는 불법 선거운동 신고포상금제로 '선파라치'라는 신종 직업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이 불법 선거운동을 할 간 큰 정치인은 흔치 않을 것이다.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에서도 초선 의원들이 당 대표를 몰아내려 할 정도로 당 조직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파괴된 구조 속에서 정당 보스들이 하향식으로 공천하는 관행은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총선 후보 물갈이가 일어나고 있다. 봄은 왔지만 아직 녹지 않고 있는 얼음 밑으로 정치 개혁의 물줄기는 계속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총선은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개선된 선거 게임의 틀 속에서 치러질 것이다. 그러나 정치 개혁의 결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국민은 후보들의 과거 행적과 실적을 평가하고 후보들이 제시하는 미래의 비전을 보고 재선이라는 상과 낙선이라는 벌을 주는 주권을 행사한다.
우리 국민이 진정으로 정치 개혁을 원한다면 투표장에서 유권자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투표장에서 과거에 정치 개혁을 사보타지한 후보를 가려내어 떨어뜨리고, 당선이 되면 수행하겠다고 약속한 후보들의 정치 개혁 공약을 면밀히 검증하여 당선과 낙선이라는 상과 벌을 주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총선에서는 정당에 대해서도 투표를 하게 되어 있다. 어떤 정당이 정치 개혁에 적극적이었는지, 그리고 정당의 정치 개혁 약속이 획기적이고 믿을 만한가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투표장에서 상벌을 내려야 한다.
3김 시대 이후 한국 정치의 업그레이드는 투표장에서 일어나야 한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정치권 탓으로 돌리는 데는 익숙하지만 연고에 얽매이거나 돈에 매수되어 부정, 비리, 무능, 지역분열주의, 색깔론의 정치인들을 퇴출시키지 못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총선이 한 달여 남은 지금 각 당의 후보들이 속속 결정되고 있다. 이제 정치 개혁은 국민의 손으로 넘어갔다. 국민은 두 눈을 부릅뜨고 한 달 동안 후보들의 행적, 실적, 공약을 평가·검증하여 정치 개혁을 완수하고 한국 정치를 업그레이드할 국회를 이번 총선에서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임 혁 백 고려대 정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