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가 생활과 분리된 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던 모더니즘의 시대부터였다. 당초 벽화는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예술양식이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고구려 고분벽화는 물론 선사시대의 동굴벽화 등에서 볼 수 있듯, 벽화는 사람들의 가장 가까이에 살아 숨쉬던 정서였다. 최근 국내 미술계에서 벽화 개념을 도입한 전시가 잇달아 열리는 것은 벽화를 생활과 밀착한 미술 장르로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읽힌다.카이스 갤러리가 11일 시작하는 'Wall Works ?'는 최초로 열리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에디션(edition) 벽화' 전시회로 관심을 모은다. 에디션 벽화는 사진이나 판화처럼 한정된 수량의 복수 제작이 가능한 벽화를 말한다. 작가가 정한 작품 규칙에 따라 실제 제작 공정은 전문 기술자나 제3자에 의해서도 완성될 수 있도록 한 에디션 벽화는 외국에서는 이미 첨단의 미술 장르로 각광 받고 있다. 미술관이나 화랑의 벽에 액자에 넣어져 걸린 작품을 보는 것 으로 굳어져 있던 미술 감상에 대한 인식이, 벽과 작품 자체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벽화작업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말 열렸던 'Wall Works?'에서 백남준을 비롯해 이미 크뇌벨, 실비 플뢰리, 다니엘 뷔렝 등 세계적 현대미술가들의 에디션 벽화를 소개했던 카이스 갤러리는 'Wall Works ?'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30, 40대 젊은 국내 작가들의 신선한 작업을 보여준다. 참여 작가는 고낙범 문경원 서정국 서혜영 성낙희 이미경 정연두 홍승혜 8명이다.
고낙범은 세잔느의 정물화를 33가지 색채로 분석한 작업을 보여준다. 33가지의 색을 수평의 길다란 스트라이프로 배치하고, 그 위에 이 색상들로 그린 정물화 한 점을 따로 얹어놓은 그의 작업은 벽면과 주위 공간을 화려한 색의 화음으로 가득찬 음악적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벽면에 야광 안료를 바른 알루미늄 오브제를 붙인 뒤 블랙라이트 조명을 비추는 서정국의 작품 '별'은 거칠고 딱딱한 콘크리트 벽을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는듯한 환상적 모습으로 변화시킨다. 이미경은 잔디처럼 푸른 초록색으로 칠한 벽면과 그 벽 앞에 기대앉아 쉴 수 있는 빨간색 의자를 하나의 세트로 결합, 느긋하고 여유있는 벽의 의미를 되살리려 한다.
정연두는 한 지역 주민의 댄스파티에서 찍은 1,000여 장의 사진을 전사한 즐거운 작업을 내놨다. 벽면에 점점이 새겨진, 서툴면서도 즐겁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람들의 춤 동작이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문경원의 벽화에도 인물이 등장한다. 선 채로 정지된 사람들의 갖가지 동작을 새긴 타일과 LCD모니터를 조합한 그의 작업은 정중동의 움직임 속에 상호작용하는 인간상을 드러낸다.
컴퓨터의 픽셀 단위로 정교하게 계산된 기하학적 추상작업으로 의 작가로 잘 알려진 홍승혜는 벽화를 통해 스케일의 확장을 시도한다. 건축의 한 요소인 창문틀 모양이 거대한 형태로 분열과 증식을 거듭하는 그의 벽화는, 그 자체가 무미건조한 현대인의 도시환경을 연상시키면서도 따뜻한 파스텔 톤의 색조로 생명의 온기를 함께 전하려 한다. 인공과 자연, 기하학과 유기체가 대립을 벗어나 화해하기 바라는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벽돌의 이미지를 기호화 한 서혜영, 종이 위에 떨어진 잉크의 우연한 흔적을 거대하게 표현한 성낙희의 작업도 홍승혜의 작업과 일맥상통한다.
이번 전시작품들의 에디션은 각각 5개. 에디션 벽화는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하다. 작가의 작품 아이디어는 현장 벽면의 크기와 형태에 맞춰 변용이 가능하다. 구매 인증서가 주어져 이사를 가는 등 경우에는 기존 벽화를 지우고 새로운 장소에 재설치할 수 있다. 회화나 사진처럼 재판매도 물론 가능하다. 전시는 4월 24일까지. (02)511―0668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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