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광고 모델로 나선 까닭드라마 '다모' '발리에서 생긴 일'로 톱스타 반열에 오른 하지원이 요즘 TV에서 광고하는 상품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게 있다. 화장품이나 향수가 아니라 라면이다. 라면 광고는 대개 코미디언이나 먹성 좋아 보이는 남자 스타의 몫. 하지만 하지원은 이 광고에 꽤 잘 어울린다.
하지원은 왜 향수보다 라면 광고가 더 어울릴까. 20대 여자 연기자들에게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청순하고 도도한 이미지가 그에게는 없다. 금세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큰 눈과 선한 입매를 지닌 그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청순한 이미지뿐 아니라, '최지우는 청순함', '전지현은 도도함' 식으로 그를 규정할만한 특별한 이미지가 없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판이한 역할을 소화해서다.
영화 '가위'(2000)에서는 귀신 들린 여대생, '폰'(2002)에서는 악령의 존재를 파헤치는 기자를 연기하며 공포영화 주인공의 이미지를 굳혔다. 그런가 하면 '동감'(2000)에서는 상처를 지닌 날라리 여대생, '색즉시공'(2002)에서는 뇌쇄적인 미소와 늘씬한 몸매로 뭇 사내들을 홀리는 대학 퀸카였다. 연기자로서 고정된 이미지가 없다는 건 다양한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하는 연기력을 갖췄다는 증거다. 하지만 광고 모델로서는 약점이다.
여고생 전문 배우?
영화 데뷔작인 미스터리 스릴러 '진실게임'(1999)에서 살인 용의자인 17세 여고생 역을 맡았던 그는 4년 만에 영화 '내 사랑 싸가지'에서 다시 '고딩'으로 복귀했다. 권상우와 함께출연하는 다음 작품인 '신부수업'에서도 또 사고뭉치 여고생이다. 어리고 미숙하지만 톡톡 튀는 감성을 지닌 10대 소녀를 그만큼 제대로 연기할 사람은 흔치 않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일차적으로 하지원의 어려보이는 외모다. 그러나 10대부터 20대 후반까지 아우르는 배역들을 소화한 것을 보면 그것만은 아니다. 타인의 접근을 쉽게 허하지 않는 도도함, 한때는 여성의 미덕으로 여겨진 내숭이 그에게는 없다. 본인 스스로도 그게 싫다고 한다. 자신을 숨기는데 인색한 그의 솔직함은 10대의 감성과 맞닿아 있다. 하지원의 팬들은 '하지원처럼 되기'를 부르짖는다. 그들이 '하지원처럼 되기'로 명명한 삶의 방식은 스스럼 없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이다.
생활형? 빈곤형?
하지원은 영화든 드라마든 '신분상승'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얼굴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부잣집 딸이나 유한계급과 어울려 보이지도 않는다. 실제 하지원의 이름 석자를 시청자들의 머리 속에 각인 시킨 작품에서 그는 관비였거나 하층민이었다.
종사관 황보윤으로부터 "내가 너에게 무엇이더냐"는 질문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좌포도청 다모(茶母) 채옥(MBC '다모'), 재민과 인욱 사이에서 하루는 그람시를 읽고 다른 하루는 짐을 싸서 오피스텔로 입주하는, 가난하고 뻔뻔한 그래서 슬픈 여자 이수정(SBS '발리에서 생긴 일').
칼을 휘두르며 남정네들과 일합을 겨루는 것은 물론 화살이 몸에 박혀 고슴도치가 된 상태에서 죽는 장면도 절대 사양하지 않는다. 재벌집 사모님들, 상속녀인 딸 등에게 수시로 얻어 터진다. 오갈 데가 없어 친구 집에서 빌붙어 사는 '이수정'을 그만큼 실감나게 연기할 수 있는 동년배 여자 연기자가 또 있을까? 하지원만의 희소성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 하지원 인터뷰
"'다모' 찍을 때는 싸워서 범인 잡느라고 그랬지만 이번엔 아예 인간 이하 취급 받으면서 여러 사람한테 맞았어요. 아무리 연기지만 너무 아프던데요."
하지원(25)은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툭하면 맞았다. 정재민(조인성)의 엄마와 약혼녀인 영주(박예진)에게 수시로 뺨을 맞는가 하면 영주 엄마에게는 아예 머리채를 잡혔다. 조실부모하고 건달 오빠와 어렵게 살아온 밑바닥 인생이면서 재벌집 아들과 사귀게 된 '이수정' 역을 맡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기생충' '버러지' '쓰레기' '그지 깽깽이'라는 소리까지 여기 저기서 들었다. 더욱이 인욱(소지섭) 어머니는 "걔 보아하니 참 없이 생겼다"는 대사까지 했다.
"왜 순정만화 보면 늘 가난하고 평범하게 생긴 앤데 남자애들이 좋아하잖아요. 또 실제 제가 그렇게 없이 생겼다고 해도 '아, 내 인상이 그런가 보다'하면 그만이죠."
비록 드라마 속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연거푸 '없는' 배역을 선택한데 대해 하지원은 아무런 거리낌 없다. "지난 번엔 관비였고 이번엔 가난한 고아라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앞으로 신분 상승 좀 하겠죠 뭐."
그러면서 자신만의 맹랑한 논리를 폈다. "잘난 척 예쁜 척 하는 거 보다 사람 냄새가 나는 연기하는 게 더 좋아요. 자다 일어나서 머리 부시시한 걸 그대로 보여주더라도 그게 더 예뻐 보일 수 있거든요." 그 근거를 그는 시청자들의 높아진 수준에서 찾았다.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고 리얼한 연기 좋아하세요. 며칠 전 끝난 '발리…'을 젊은 여성들이 많이 본 것도 드라마에서 꼭 자신과 닮은 모습을 발견해서 그랬던 거죠."
하지원의 분석에 따르면 '발리…'의 매력은 너무 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이수정을 통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욕망을 그대로 그렸기 때문에 자꾸 보게 된다나요."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는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한참 뽐내야 할 20대 여성 연기자 치고는 무모할 정도다. MBC 드라마 '다모'를 할 때는 와이어 액션을 혼자서 해냈고 '발리…'은 남자와 헤어진 다음날 일어나 꾸역꾸역 밥을 먹는 이수정을 한치 오차 없이 소화했다.
"그거 연기 아니에요. 실제 세상에 모든 여자들이 아무리 속상하더라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먹어요. 밥을 퍼먹다 막 흘리기도 하구요. 저도 그렇고 제 친구들도 그래요." 이쯤 되면"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거짓말을 안 하는 정도에요."라는 그의 말이 '겸손'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오늘날의 하지원을 만든 건 팔 할이 솔직함의 미덕이다.
/김대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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