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기지개를 켜던 산하가 때아닌 폭설로 혼쭐이 났다. 남쪽 끝 어디선가 꽃불을 손에 움켜쥐고 북상하려던 봄도 잠시 그 걸음을 멈췄다. 겨우내 언 땅을 박차고 나오려던 연둣빛 고운 싹들은 심술궂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어쩔 줄 모른다. 봄마중 가려던 나그네의 발길이 주춤한다. 여유와 느긋함이 필요한 시기다. 그래서 좀 무리하더라도 모처럼 멀리 떠나본다. 이제 막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호주 빅토리아주, 자연이 펼치는 그 환상의 세계로.그레이트 오션 로드- 자연이 빚은 장대한 예술작품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1932년 호주 빅토리아주 해안을 따라 만든 총길이 360km의 고속도로. 이 곳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기묘한 해안절벽과 기암괴석들이 길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대장정의 출발점은 서쪽 끝 도시 와남불. 시내를 빠져 나온 지 30분. 너른 초원과 동행하며 시원한 지평선을 만들던 하늘은 어느새 광막한 수평선을 그린다. 첫 기착지는 베이 오브 아일랜드. 탁 트였던 가슴이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만나자 갑자기 턱 막힌다. 경이와 탄성. 그레이트 오션 로드가 이방인을 맞이하는 방식이다. 우뚝 솟은 바위 기둥 사이로 내달려온 파도가 깎아지른 절벽의 위용에 힘없이 부서져 하얗게 부서진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난파해안(shipwreck coast)'이라는 섬뜩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알려진 것만 해도 무려 135척의 배가 이 해안에서 침몰했다고 한다. 폭풍우로, 짙은 안개로, 기관 고장 등으로. 하지만 막상 절벽에 서면, 아름다운 해안 풍광에 취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려던 선원들의 넋잃은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모습이 닮아 이름 붙여진 '런던 브리지'를 지나 '로차드 협곡'에 들어서면 조금전의 연상이 강한 확신으로 바뀐다. 아찔하게 우뚝 솟은 두 개의 절벽이 바다를 막아 쪽빛 바닷물을 가뒀다. 갈 길 잃은 바닷물이 햇살에 반사돼 보석 같은 물비늘을 반짝거린다. 1878년 여기서 배 한 척이 난파됐다. 가까스로 두 남녀가 살아남았고 이내 언론에 대서특필 된다. 사람들은 둘의 러브스토리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남자는 선원 여자는 귀족이라는 신분차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남자가 둘의 구조요청을 위해 기어올랐다는 까마득한 절벽을 올려다보니 고개가 뻐근하다.
쭉쭉 뻗은 도로지만 차는 좀체 속도를 내지 못한다. 자연이 빚은 예술 작품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12사도 바위'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자 속력은 절반으로 뚝 떨어진다. 이젠 '숲'을 보기 위해 헬리콥터를 탄다. 10∼20분 비행에 약 100 호주달러. 절경이 한 눈에 들어오자 입이 쩍 벌어진다. '쿵쿵쿵….' 벅찬 가슴은 헬리콥터 소리보다 요란하게 뛴다. 밀려오는 감동은 가슴으로 담고,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카메라로 담는다.
펭귄 퍼레이드- 자연이 펼치는 한밤의 재롱잔치
남극에만 펭귄이 산다고? 그렇지 않다. 호주에도 펭귄이 산다. 주인공은 평균키 33cm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펭귄인 '리틀 펭귄'. 멜버른에서 동쪽으로 차로 90분 거리에 있는 필립섬은 펭귄 퍼레이드를 찾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펭귄 퍼레이드는 바다 속 펭귄들이 해질 무렵 뭍으로 나와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 앙증맞은 퍼레이드를 카메라에 담고싶지만 펭귄들의 눈 보호를 위해 촬영이 금지돼 있다.
어둑어둑 바다에 밤이 찾아오면 뒤뚱뒤뚱 펭귄들의 '필립섬 상륙작전'이 펼쳐진다. 스탠드에서 이를 지켜보는 3,000여명의 눈빛이 남반구 밤하늘에서만 볼 수 있다는 남십자성보다 더 초롱초롱 빛난다. 설렌 가슴 안고 숨죽이며 '꼬마신사'들의 한밤 행진을 기다린 지 10분. 드디어 펭귄 세 마리가 모습을 보인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작은 탄성이 들려온다.
그런데 아뿔싸.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녀석들에게 얄미운 복병이 나타난다. 바로 파도. 짧은 발을 바삐 움직여 저항해 보지만 밀려오는 파도엔 역부족이다. 그만 맥을 못 추고 다시 허망하게 쓸려간다. 다시 전진을 시도한다. 또 다시 후퇴. 그러나 포기는 없다.
파도와의 오랜 승강이가 펭귄의 승리로 끝나는가 싶더니 세 녀석들이 앞으로 가지않고 자꾸만 힐끗힐끗 뒤를 돌아본다. 아직 나오지 않은 가족과 친구를 기다리는 것이다. 몇 분이 지났을까. 세 마리가 합류한다. 그래도 꼼짝 않는다. 여섯 마리는 빙 둘러 무언가를 속닥거린다. 안전한 귀가를 위한 작전회의다. 다시 두 마리 합류. 그제서야 녀석들은 꽥꽥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고지를 향한다. 짧지만 당당하고 또 귀여운 발걸음이다.
밤마다 퍼레이드를 펼치는 펭귄은 대략 200마리로 약 50분간 이어진다. 녀석들은 사람들을 보고도 아랑곳 않고 길을 재촉한다. 가까이 다가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도망가거나 외면하기는커녕 멀뚱히 쳐다보기까지 한다. '간 큰(?) 동물' 펭귄. 그러나 동트기 전 바다로 갈 땐 밤새 간이 작아지는지 사람들을 보면 재빨리 숨어버린다고 한다.
해안가 상륙은 퍼레이드의 또 다른 시작. 이제 펭귄들은 둔덕을 올라 제 집을 찾아가야 한다. 공원측은 매일 밤 똑같은 길로 보금자리를 향하는 펭귄의 습성을 이용, 그 길 위로 사람들이 내려다 볼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오랜 친구를 만났는지 요란하게 수다를 떠는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갈 길은 먼데 서로 껴안고 차마 발길을 못 떼는 펭귄들도 있다. 이제 막 사랑이 싹 튼 연인인 것 같다. 먼 길을 같이 오다 갑자기 서로 떨어져 올라가는 녀석들은 오는 길에 사소한 말다툼을 했나 보다. 자연의 익살에 동화가 된 걸까. 펭귄들의 귀가가 끝나고 섬이 제 모습을 찾자 이젠 사람들의 발걸음이 뒤뚱거린다.
/빅토리아주(호주)=글·사진 김일환기자 kevin@hk.co.kr
호주는 어디든 말뚝만 박으면 유명 관광지가 된다. 그만큼 천혜의 자연을 가진 복 받은 나라다. 호주 제2의 도시 멜버른(인구 340만명)이 있는 빅토리아주 역시 그렇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조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멜버른과 캐나다의 벤쿠버가 뽑혔다. 하지만 멜버른은 가끔 서운하다고 불평한다. 오페라 하우스를 가진 시드니(인구 400만명)의 빛에 가려 그 진면목을 다 보여주지 못해서다. 빅토리아주에서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풍광을 소개한다.
가든시티 멜버른
멜버른은 싱그럽다. 도심 한복판에 우뚝우뚝 솟은 빌딩 사이엔 어김없이 넓은 공원 숲이 조성돼있다. 이 숲은 청량한 녹색 산소를 콸콸 뿜어댄다. 그래서 '정원도시(city of garden)' 멜버른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특히 호주 대륙을 처음 발견했다는 제임스 쿡 선장의 오두막을 영국에서 그대로 옮겨놓은 피츠로이 정원의 넓은 땅과 우거진 나무를 보고 푸르른 잔디를 밟으면 이 도시 사람들의 공원사랑이 금방 느껴진다.
먼저 전망대에 올라 멜버른을 한눈에 둘러본다. 정방형으로 반듯하게 계획된 도시가 한눈에 박힌다. 원주민 말로 '끊임없이 흐르는 강'이라는 뜻을 가진 야라강이 남북을 가로지르며 도시의 젖줄 역할을 한다. 크기는 한강에 비할 바 아니지만 강을 중심으로 빅토리아풍의 낮은 건물과 현대 첨단 고층 빌딩이 조화를 이루며 눈부신 야경을 자아낸다. 야라강변 카페에 앉아 맥주 한잔과 함께 남반구 낯선 도시의 여유와 낭만을 마신다.
시내에서 가장 좋은 교통수단은 무료로 운행되는 자주색 '시티 서클 트램'이다. 트램은 도로 위를 달리는 전동차. 시티 서클은 12분 마다 운행한다. 멜버른 박물관, 수족관, 전쟁 기념관, 각종 신선한 과일과 진기한 물건들을 살 수 있는 퀸 빅토리아 시장 등 시내 주요 관광지에 들른다. 차이나타운, 그리스 거리, 이탈리안 거리 등에서 70여개국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골든시티 발라랏
멜버른에서 차로 1시간30분을 달리면 금빛 꿈으로 부푼 19세기 호주 역사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골드러시의 심장부인 소버린힐에 1850년대 금광촌을 그대로 재현했다. 뿌연 먼지 날리며 달리는 마차, 거리를 활보하는 19세기 복장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 옛날, 꿈으로 가득한 일상을 경험한다. 금광에 들어가 당시 금 채굴 과정을 살펴본 후, 그 옆 개울에 앉아 직접 사금을 채취할 수도 있다. 여기서 발견한 금은 모두 자기 것이다. 박물관에서 180만불짜리 묵직한 금괴도 만져본다. 한 손으로는 들기도 힘들다.
호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캥거루와 코알라와의 만남. 발라랏 야생동물 공원으로 간다. 겅중겅중 캥거루들이 맨 먼저 북반구의 이방인을 반긴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먹이를 올려놓은 손바닥이 어느새 캥거루 두 앞발에 힘껏 잡힌다. 긁힐 염려는 없다.
단데농 휴양지와 증기기관차 '퍼핑 빌리'
단데농은 멜버른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산림 휴양지. 도시생활에 지친 멜버른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즐겨 찾는 곳이다. 석탄을 태워 움직이는 증기기관차 '퍼핑 빌리'에 올라 탄다. 1900년 개통돼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증기기관차이다. 칙칙폭폭 퍼핑 빌리가 달리기 시작하면 창문에 걸터앉아 단데농의 울창한 숲길을 감상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기관차 속도가 느리고 안전장치가 잘 돼 있어 위험하지 않다. 달리다 보면 출발 때 코를 찌르던 매캐한 석탄 냄새는 사라지고 청량한 숲 향기에 코가 뻥 뚫린다. 멜버른 근교인 벨그레이브를 출발해 왕복하는데 2시간 가량 걸린다.
와룩 농장과 필립섬
펭귄 퍼레이드를 보러 필립섬에 가는 길에 잠시 '와룩 농장'에 들른다. 양털 깎기와 양몰이 개의 시범, 소 젖 짜기, 웜벳 우유 먹이기 등 다양한 농장체험을 한다. 호주의 전통 빵인 '덴파'를 직접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요리는 간단하다. 밀가루에 소금만 넣어 반죽한 후 꼬챙이에 꽂아 불 위에 익히면 끝. 담백한 맛에 하나만 먹어도 속이 든든해진다. 와룩 농장에서는 소고기를 와인에 푹 담가 숙성 시킨 스테이크를 맛 볼 수 있다. 고기가 연하고 부드러워 농장 최고의 먹거리다.
필립섬의 펭귄 퍼레이드는 해가 떨어져야 펼쳐진다. 그림 같은 해안선을 가진 '더 노비스'에 가면 펭귄 행진의 리허설을 볼 수 있다. 주인공은 펭귄이 아니라 물개. 제주도 성산 일출봉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꺽꺽 소리 내며 한가로이 노니는 물개들을 보면 그 생각은 이내 사라진다.
/빅토리아주(호주)=글 사진 김일환기자 kevin@hk.co.kr
● 여행 수첩
멜버른은 '하루에 사계절이 있다'고 할 정도로 일교차가 심하다. 남반구에서 3월은 가을의 시작. 아침엔 약간의 한기를 느낄 정도인 영상 12∼13도를 오가다 한낮엔 영상 25도를 웃돈다. 저녁엔 다시 서늘해진다. 따뜻한 점퍼 준비는 필수. 또한 우리나라와 달리 차가 왼쪽으로 주행하므로 도로를 건너거나 차를 렌트할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문의 호주 빅토리아주 관광청 한국 사무소(02-752-4131)
한국에서 멜버른으로 직접 가는 비행기는 현재 없다. 캐세이퍼시픽항공(02-311-28))은 서울을 출발, 홍콩을 당일 경유해 멜버른까지 가는 비행기편을 주13회 운항한다. 약 13시간 걸린다. 대한항공(1588-2001)과 아시아나항공(1588-8000)은 매일 1회 서울-시드니행을 운행하며 멜버른까지는 로컬항공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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