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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52>슐레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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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52>슐레겔

입력
2004.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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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3월10일 독일 인도학의 개척자인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이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1829년 본에서 몰(沒). 독일 문화사에서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은 그의 형 아우구스트 빌힐렘 폰 슐레겔(1767∼1845)과 흔히 묶여 거론된다. 두 사람 다 헤르더, 피히테, 레싱, 슐라이어마허 등의 영향 아래 독일 낭만주의의 토대를 놓는 데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낭만주의 잡지 '아테나움'(1798∼1800)의 공동 창간자였다.동생 슐레겔은 형 슐레겔보다 늦게 태어나 이르게 죽었지만 활동 영역은 훨씬 더 넓었다. 형제가 티크, 노발리스(본명은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 바켄로더, 셸링 등과 함께 예나 낭만주의 서클을 결성했을 때 이를 주도한 것은 동생이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시인의 정신적 자유의 보증을 아이러니에서 발견하는 낭만주의 예술 창작 이론을 다듬었고, '인도 사람들의 언어와 지혜'를 통해 인도에 대한 동시대 유럽인들의 관심을 부추기기도 했다. 주로 이론에 치중한 형과 달리, 동생은 이론적 글쓰기만이 아니라 소설, 희곡 창작에까지 손을 뻗쳤다. 동생 슐레겔은 만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빈으로 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고위 관직에 있으며 신성동맹을 지지했다. 당대의 낭만주의자들 다수가 그랬듯, 그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동생보다 덜 활동적이기는 했지만, 형 슐레겔이 하찮은 지식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스탈 부인과 가까이 사귀며 그녀로 하여금 독일 문학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유명한 '독일론'을 쓰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그다. 창조적 재능이 부족해 읽을 만한 시나 소설을 쓰지는 못했지만, 그는 외국 문학의 걸작들을 번역해 독일어권 독자들의 문학적 지평을 크게 넓혔다. 특히 17편 9권으로 마무리된 그의 셰익스피어 번역은 지금도 낡지 않았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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