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학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주장이나 이론을 소개하고 그 반대 논리는 무엇인지 짚어보는 '논쟁' 란을 신설합니다. '논쟁'은 한국 문화의 이슈를 한눈에 조망하는 기회를 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중국의 역사 왜곡을 둘러싼 논란, 한·일 독도 분쟁 등 동북아 갈등이 수그러들지 않자 이를 둘러싼 민족·국가주의 논쟁이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역사를 뺏길 수 없다"며 일어서는 한편에서 편협한 민족주의, 일국 중심의 국가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국사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국사라는 신화를 넘어서자
지난해 8월 임지현 한양대 교수 등이 주도한 공개토론회 '국사의 해체를 향하여'의 내용을 담은 단행본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휴머니스트 발행)가 최근 출간됐다. 이 책에서 임 교수는 "최근의 역사전쟁에서 보듯이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현상적으로는 충돌하지만 사유의 기본적인 틀과 이데올로기적 전략을 공유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족주의를 국민 통합과 동원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는 동아시아의 국가권력은 표면적으로는 적이지만 실제로는 내연관계"라며 "이들은 동아시아의 민중들 사이에 민족적 냉전체제를 조성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재생산함으로써 권력의 헤게모니를 강화해왔고,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화하는 데 국사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임 교수는 이어 "한국의 국사를 정사로 놓고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는 틀렸다는 비판이 설득력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며 "제국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의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에 대한 비판은 마땅하지만, 식민주의 혹은 패권주의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국사가 그들의 국사보다 정당하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 저술가 탁석산씨의 최근 저서도 비판의 강도나 문제 해결 방식은 다르지만 민족·국가주의를 극복하자는 비슷한 논리를 담고 있다. 탁씨는 TV 토론프로그램 형식을 빌린 독특한 구성의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웅진닷컴 발행)에서 민족주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사다리)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개인의 재산권과 정치적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국민이 아니라 시민이 되어야 하며 그 마지막 단계에서 '민족주의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 교수는 '국민으로부터의 탈퇴'(삼인 발행)에서 "이제 한국사회에서 '국민'이 아니라 주민, 시민, 혹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이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 사회나 국제 문제를 모색하고 해결하는 흐름이 커져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문제 제기를 했다. 이밖에 당대비평 봄호에 실린 황병주(한양대 강사)씨의 '국사라는 기억의 제도, 그 모호한 확신의 열정', 민주노동당 정책이론지인 격월간 '이론과실천' 최근호의 '고구려사는 대한민국 국민만의 역사가 아니다'도 비슷한 맥락의 주장을 담고 있다.
국사 폐기론은 낭만적이고 때일러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현실을 무시한 낭만적인 생각이라는 비판이 주류를 이룬다. 이영호 인하대 교수는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에서 "민족주의와 그에 기반한 국사의 문제점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모두에 정신사적 배경이 있는 건 공감하지만 과연 현실적인 국제관계가 민족주의와 국사의 폐기를 지향하기에 적합한 조건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오히려 "애국주의에 기초한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 일본의 군사 대국화, 중국의 티베트 탄압 등 전형적인 적대적 공범관계나 전세계적인 지배의 청산을 촉구하는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최근 창립한 고구려연구재단의 김정배 이사장은 "국사 해체론은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낭만적인 생각"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평화를 지향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현실에서 그런 발언이 용납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라며 "우리나라가 부강하고 여유 있는 상황이 됐을 때 그런 담론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지 지금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임지현 교수는 "성찰적 동아시아 역사상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목표조차도 동아시아라는 역사·지리적 공간으로 확대된 국사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며 "국사를 해체할 대안으로 준비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민족주의와 근대적 국민국가는 과연 넘어설 수 있는 것일까?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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