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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알로에 인생 김정문 <32> 전란 속의 또다른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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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알로에 인생 김정문 <32> 전란 속의 또다른 아픔

입력
2004.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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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도 있었다. 동아대 동기 이영훈은 38선이 무너진 지 열흘도 안된 1950년 7월초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그는 내게 "김관현이란 경남중 2학년생이 있는 데 자네에게 맡길 수밖에 없네"라며 양육을 부탁했다. 그는 "관현이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보니 홀어머니가 보호자 자격이 없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아이는 똑똑하고 착하지만 술집을 하는 어머니는 남편이 수시로 바뀌는 등 환경이 영 안 좋다는 얘기였다. 전쟁터로 나가는 친구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애를 맡고 10개월쯤 뒤인 51년 5월 일본에 드나드는 밀항선 주인이라는 그녀의 새 남편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는 대뜸 "일본은 태평양전쟁 이후 몰라보게 달라졌다"며 밀항을 권했다. 관현이를 맡아 기르니 값은 최대한 싸게 해주겠다고 했다.

처음엔 무심코 흘려 들었다. 그런데 따져보니 당시 이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영훈이처럼 인민군과 싸울 수도 없었다. 폐결핵을 앓은 나는 신체검사에서 무종 판정을 받아 입대가 불가능했다.

나는 가가와 도요히코와 '국제기독교대학'을 떠올렸다. '사선(死線)을 넘어서'의 저자인 가가와는 빈민과 노조운동 등을 주도한 기독교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2차대전이 끝나자 세계를 한 연방으로 만들면 국가·민족간 모든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상 세계를 만들기 위해 그는 국제기독교대학을 설립했다.

나도 광복 후 열렬한 세계연방주의자가 됐기 때문에 이 대학 입학을 꿈꾸어 왔다. 그래서 어머니, 누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1,000권이 넘는 책을 파는 등 자금 마련에 나섰다. 한번 마음 먹으면 앞 뒤 가리지 않는 돈키호테 기질이 꿈틀댔다. 곡절 끝에 기독학생동지회의 주요 멤버와 남동생 정실이, 문동환 목사 등 10명의 여비를 마련했다. 지금 돈으로 1인 당 60만원 정도 된 것 같다. 고 문익환 목사의 친동생인 문 목사는 친구 소개로 만난 뒤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우린 연방주의를 고리로 쉽게 의기투합했다.

51년 초여름 뱃삯을 치르고 도쿄 근처의 일본 본토로 향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막연한 두려움 등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관현이 부모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0시간도 안 돼 닿은 땅은 본토가 아닌 대마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마도 정착 한국인에게 여권 발급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됐다. 고스란히 일본 경찰에 잡히는 신세가 된 우리는 나가사키의 오무라 수용소로 이송됐다. 밀입국 한국인을 임시 수용했다 선반 한 척의 인원이 차면 한국으로 호송하는 대기소였다.

그곳에서도 일요일이면 문 목사가 설교와 예배를 주관했다. 레크리에이션도 하면서 철없이 즐겁게 지냈다. 관현이는 "변성기라 목소리가 이상하지만 아저씨(나를 그렇게 불렀다)에게 배운 가곡을 불러보겠다"며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한 달이 지나 호송선에 실려 부산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곧장 부산 북부경찰서로 이송돼 심문을 받고 하루 만에 풀려났다. 유치장에서 잠 못 이루는 동안 밀항 사기, 강제 호송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관현이의 운명은 비참했다. 경남고를 졸업했으나 내 형편으론 대학에 보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해군 교향악단에 들어가 바이올린 연주자가 된 그는 오른쪽 손가락 네 개가 굳어지는 희귀병을 앓게 됐다.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한 그는 제대를 해 서울의 달동네에서 홀로 지내던 어머니와 살았다. 그러던 중 신문에 조그만 기사가 실렸다. 관현이 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슬프진 않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는 내용이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니까 61년 여름 무렵이다.

원통했다. 착하고 머리 좋은 학생이 미처 꽃 봉오리도 피우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현실이 안타까웠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돈만 있었다면 대학도 보내고 치료도 할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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