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리 미 상원의원이 지난 주 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자,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그를 유럽의 희망후보(Wunschkandidat)라고 일컬었다. 독일어 wunsch는 영어로 wish 또는 desire를 뜻한다. 이 신문은 이라크 전쟁등에서 미국을 추종한 영국과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정부는 다르겠지만,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 유럽인들은 케리가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고 논평했다.유럽의 이런 희망사항은 케리의 미국이 일방주의를 벗어나 다자간 국제협력의 장으로 되돌아 올 것이란 기대가 바탕이다. 케리 후보는 테러와의 전쟁 등 부시 행정부 대외정책의 근본을 시비하지는 않지만, 우방을 배제한 일방주의 행보로 고립을 자초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집권하면 이라크 개입정책은 물론이고, 교토 환경협약과 국제형사재판소 가입 등 국제문제 전반에서 부시 행정부와는 다른 자세를 보일 것이라는 기대다.
유럽의 반 부시 정서는 대외 정책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진보세력의 'Anyone but Bush'(부시가 아니면 누구든 좋다)운동처럼, 부시 행정부의 신보수주의 경제사회 정책이 미국과 세계를 타락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극단적 갈등으로 이끈 데에 대한 위기의식이 작용한다는 풀이다. 그만큼 미 대통령 선거는 세계적 차원의 이념 투쟁 터가 되는 시대다.
케리가 예상 밖으로 강력한 도전자로 부각되자, 우리 사회도 은연중 미국의 정권 교체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그런 기대를 내비치는 것을 언감생심으로 여기는 듯 하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반 부시 정서가 분출하는 것에 비춰 이제 우리 자신의 기대를 표출하는 것을 마냥 꺼려 할 것은 아니다. 미국 대통령의 낙선을 바라는 것을 불경스레 여긴다면 시대착오적이고, 재선된 부시의 보복을 걱정한다면 유치하다. 얽힌 이해가 우리만큼 깊은 사회가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우리 사회 다수 여론은 북한보다 미국을 안보에 더 큰 위협요소로 생각한다는 조사결과에 스스로 놀란 기억이 있다. 이런 인식의 타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강경노선이 우리 국민에게 지속적인 불안감을 안긴 결과일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전통적인 한미 우호를 위해서도 미국의 북핵 정책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 대안은 이념과 체질을 바꾸기 어려운 정권 자체가 온건한 정부로 교체되는 것이다.
이런 당위론을 철없다고 비웃는 이들은 미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외정책 기조는 이를 테면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차이 정도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윌슨 루스벨트 트루먼 케네디 클린턴 행정부로 이어지는 민주당의 '진보적 국제주의'가 공화당보다 적극적인 해외 개입과 패권 확보를 추구한 사실마저 상기시킨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그저 굳건한 한미 공조에 기대어 그들이 우리의 이익을 돌봐주기를 바라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란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이상주의나 무기력한 현실 안주의 소산이다. 정권 교체가 미국의 대외인식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더라도, 정권에 따른 대외 정책의 차별화 또한 뚜렷하다. 케리 후보가 클린턴 정부 말기 타결 직전에 이른 북핵 문제를 부시 행정부가 악화시켰다고 비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부시 정부는 강경자세를 고집하다가 6자 대화의 주도권을 중국에 내주는 실책을 저질렀다고 비판 받고 있다. 케리가 북미 대화를 강조하는 것은 그런 전략적 반성에 기초한 것이고, 부시 대통령도 이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과도기 혼란 속에 아무 노릇을 할 게 없다고 주저 앉아서는 안 된다. 한국민의 불안을 덜어 줄 케리 대통령을 기대한다고 떠드는 것이 필요하다. 희망사항을 노래하는 것은 자유이고, 한반도의 격변에 자주적으로 대처하는 지혜이기도 하다.
강 병 태 논설위원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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