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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고대史 전쟁]<8>동북공정의 논리-④고구려와 隋·唐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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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고대史 전쟁]<8>동북공정의 논리-④고구려와 隋·唐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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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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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학자 류쥐(劉炬)는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 안에 있었고, 대대로 중국에 조공을 바친 고구려를 완전히 중국에 흡수해 통일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 장보취앤(張博泉)은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통일적 다민족 중앙집권국가가 요동의 군현을 수복하는 전쟁이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동북사범대학의 류허우성(劉厚生)은 남북한 학자들이 고구려가 생활하던 곳을 그들의 옛 땅이라 하고 중국의 동북지구에 대한 역사주권을 극력 부정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한 당이 만주지역을 중국의 일원으로 하는 방대한 통일을 완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구려―수나라 충돌은 강국간 국제전

하지만 수서(隋書), 당서(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에 근거할 때 중국학자들의 논리는 사실과 매우 다르다. 당시 고구려가 어떤 국가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만 확인해도 이런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흔히 알고 있듯이 고구려가 수·당의 일방적인 침략에 밀려 성공적이지만 수동적으로 방어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우선 고대역사, 특히 고구려의 역사를 단순히 영토의 관점이나 민족간의 문제로 보는 시각을 지양해야 한다. 당시 국제정치, 국가간 외교의 형세가 어떠했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5세기 광개토대왕의 영토확대정책이 성공한 이후 고구려는 만주 전체와 황해 중부 및 동해 중부 이북의 해양을 장악했다.

고구려는 이를 토대로 중국의 북조, 돌궐, 고구려, 거란 등의 북방 세력과 남조, 백제, 신라, 왜 등의 남방 세력이 만나는 중핵(中核)에서 동시 등거리외교 등 역학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물류체계를 확보해 말·담비 가죽, 다양한 보물무역 등을 통해 경제력을 향상시켰으며 사방에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강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질 높은 문화국가가 됐다.

그러나 6세기 말에 이르러 수백 년 만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세력균형이 깨졌다. 통일 중국은 이때부터 능동적으로 주변 세력의 갈등을 이용하고 조장하면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남쪽으로는 현재의 베트남과 대만지역을 침략하고 북방의 돌궐을 공격했다. 동방의 강국인 고구려와 신흥 통일국가인 수나라의 전면충돌 역시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활발한 해양활동과 다핵방사상외교(多核放射狀外交)를 활용해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에 있던 고구려도 국내 정책은 물론 대외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수와 충돌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598년 요서(遼西)지역을 먼저 공격했다. 두 나라는 국운을 걸고 전쟁에 임했으며, 614년 수가 망하기 직전까지 16년간에 걸쳐 전쟁을 지속했다.

특히 수는 남방의 노동력과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현재도 남아있는 대운하를 건설했고 수천 척의 함선을 건조했다. 612년에 수 양제가 침입할 때 이루어진 정병만 113만3,800명이었다. 함선도 수백 척이 동원됐다. 수 군사는 일시적으로 대동강 상륙에 성공했으나 결국 대패했다. 육군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 양제의 친정군(親征軍)은 요동성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수는 두 번 더 침공했으나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멸망했고, 이후 고구려의 국제적인 지위는 더욱 격상됐다.

당나라와 벌인 전쟁도 기본 성격은 같아

고구려가 당과 벌인 전쟁 역시 수와의 전쟁처럼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국제전이었다. 전쟁을 수행한 양국의 핵심 인물도 비슷하다. 단지 수의 패전을 교훈 삼아 당은 더 철저히 준비했고, 삼국통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고구려가 쇠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당은 영토를 확대하려는 정복욕과 수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본질에서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국제질서의 재편과 동아시아 장악을 둘러싼 대결이다. 이 전쟁 역시 동아시아의 모든 종족과 국가들이 참여했다.

당은 첫 공격에서 500여 척의 수군을 거느린 장량이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을 점령하는 등 승리했다. 하지만 당 태종이 지휘하는 육군은 양만춘이 지휘하는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 궤멸한 채 도주했다. 당은 군사적으로 대패함으로써 정치·외교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후 당은 수륙양면전략을 구사했으며, 특히 수군은 요동반도 해안지방을 집요하게 공격하며 659년까지 간헐적으로 전쟁을 지속했다.

국내전쟁이 아니라 국제질서의 재편을 놓고 벌인 동아시아의 국제대전이던 고구려와 수·당 전쟁은 그러나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른바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통일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삼국통일전쟁은 동아시아 최대 국제전

삼국통일전쟁 역시 신라의 한반도 통일전쟁이었다기보다 고구려와 통일 중국이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교역권을 둘러싸고 벌인 질서 재편전쟁이었다. 전쟁의 양상도 이전보다 복잡하고 격렬했으며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660년 여름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 군사가 황해를 건너 덕적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라 수군의 안내로 금강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은 항복했다.

이후 신라와 당군은 연합해 고구려를 협공하기 시작했다. 백제는 광복운동을 펴면서 일본열도의 왜국과 연합작전을 펼쳤다. 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 고구려는 말갈을 거느린 채 당과 신라를 적대국으로 삼았고, 백제와 왜 역시 양국에 맞서 직간접으로 군사적인 연결을 유지했다. 반면에 당은 신라와 동서로 연합하고, 돌궐·거란·말갈의 일부를 거느리며 전쟁을 주도했다. 주변의 소소한 국가와 종족들도 다양하게 참여했다. 해양 십자형 국제질서가 구축된 것이다.

삼국통일전쟁은 전쟁의 규모가 커진 것은 물론 전장도 대륙과 한반도 전체, 일본 열도의 일부, 그리고 해양으로 확대됐다. 동아시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 것이다. 결국 663년 남쪽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게 백강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전선이 단일화했다. 홀로 대결하던 고구려는 668년에 평양성이 함락당하고, 이어 671년 안시성이 항복하면서 '전사'하고 말았다.

고구려, 중국과 동아시아 주도권 다퉈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 그리고 삼국통일전쟁은 당시 동아시아의 모든 종족과 국가들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참여한 국제대전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교역권을 둘러싼 질서의 대결이었고, 문명의 충돌장이었다. 그리고 육지와 해양에서 동시에 최소한 70년이상 벌어진 대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동아시아에는 현재까지 지속되는 민족적 성격을 띤 기본질서가 수립됐다. 즉 통일 중국인 당의 지위가 공고해지고, 한민족국가인 신라 및 발해가 성립됐으며 신흥국가인 일본이 탄생해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한민족은 중핵조정역할을 상실해 주변부로 밀려났고, 고구려의 자의식과 다양한 문화를 불완전한 형태로 계승했다.

수·당 전쟁을 국내전으로 보는 중국학자들의 시각은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 주변 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논리의 일부이다. 또 남북한 혹은 통일한국이 만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거나 영향력을 강화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역사는 생명이다. 동북공정은 궁극으로 신중화제국주의로 가기 위한 명분을 얻으려는 연구사업이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하여 반도사관을, 만주를 침략하고 일·만 블록을 실현할 목적으로 만선사관을, 나아가 제국주의의 실현을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한 것처럼.

윤 명 철 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

■주변국 교섭 관리·조정 고구려는 동아시아 중핵

고구려는 4세기를 거쳐 5세기께인 광개토대왕 시대에 대륙의 동·서·북으로 팽창해 만주지방을 완전히 석권했다. 남으로 진출해 백제, 신라는 물론 가야까지 국가전략수립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또 해양력을 바탕으로 황해 중부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어 장수왕 시대에는 천도 등 남진정책을 추진해 남으로 소백산맥 이남, 동으로 포항 위의 흥해(興海)까지 진출했다. 이때에 고구려는 대륙과 한반도의 대부분과 주변 해양을 한 틀 속에 넣고 조정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완전한 중핵(中核) 자리를 확보했다.

그 결과 고구려와 분단된 남조(송 등), 북조(북위), 북방의 유연(柔然)이 동아시아의 중심핵이 되고 백제, 신라, 가야, 왜, 거란, 말갈 등 주변국들이 서로 교섭해 다수의 국가들이 동시에 연결되는 '다중방사상(多重放射狀)' 혹은 '다핵방사상(多核放射狀)' 국제질서가 성립했다.

그 속에서 고구려는 동아지중해의 중핵으로 각국의 교섭을 관리·조정했으며 백제, 신라, 가야, 왜 등이 북조정권은 물론 때로 남조정권과 교섭하는 것마저 막았다. 또 해양통로확보를 이점으로 삼아 등거리외교를 펼치며 분단된 중국세력들의 갈등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통일된 나라가 분단국가를 대상으로 등거리외교를 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다. 다만 과거에는 중국이 분단되었고, 지금은 우리가 분단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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