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3월9일 옛 소련의 여성 정치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80세로 모스크바에서 작고했다. 세계 여성의 날 하루 뒤였다. 콜론타이는 20세기 전반의 가장 두드러진 여성 정치인이었다. 그는 레닌 정권에서 사회 복지 담당 인민위원과 여성 담당 인민 위원을 지냈고, 스탈린 정권에서는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으로 노르웨이 공사, 멕시코 공사, 스웨덴 대사를 차례로 지냈다.그러나 콜론타이가 레닌이나 스탈린의 무비판적 추종자는 아니었다. 그는 소련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레닌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의 멘셰비키로 갈렸을 때, 레닌의 독선적 태도를 비판하고 멘셰비키에 가담했다. 러시아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에 가담해 혁명에 참여한 뒤에도, 콜론타이는 공산당 내의 '노동자의 반대' 파에 소속해 당내 민주화와 노동조합의 정치적 자유를 옹호했다. 1922년 레닌은 당내의 모든 파벌 활동을 금지했지만, 콜론타이는 그 뒤에도 당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스탈린이 집권한 뒤에도 공산당 내의 야당 역할을 계속했다. 콜론타이는 스탈린을 비판한 간부급 공산당원 가운데 숙청 재판을 면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스탈린의 이런 예외적 관용은 그가 여성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었을지 모른다.
당과 정부를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던 혁명 초기 소련에서 콜론타이는 이네사 아르만드, 소피아 스미도비치,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레닌의 부인) 등과 함께 희귀한 여성 정치인 그룹에 속했다. 그는 아르만드, 스미도비치와 함께 여성 노동자 선전선동 중앙위원회를 결성해서 당내에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확산하려고 애썼다. 콜론타이는 제정 러시아의 장군 도몬토비치의 딸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스물 한 살 때 블라디미르 콜론타이라는 엔지니어와 결혼했으나 세 해 뒤 이혼하고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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