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 담장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허름한 집. 새벽부터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 물을 긷는 사람들. 지금은 재개발로 거의 사라졌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흔히 보던 달동네의 모습이다. 이희재의 '아홉살 인생'은 1960년대 그 달동네에 살던 아홉 살 아이의 성장기다. 탄탄한 스토리와 따뜻한 주제를 담은 위기철의 소설 '아홉 살 인생'이 원작. 만화는 '나 어릴 적에'라는 제목으로 월간지에 연재됐고, 세 권의 흑백 단행본으로도 출판됐다.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우리들의 옛 이웃이야기가 4년 만에 컬러로 옷을 갈아입었다. 한 권의 고급스러운 하드 커버로 묶어 분위기도 달라졌다.'아홉 살 인생'은 주인공 여민이가 아빠 엄마와 낡은 이불 보따리,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를 들고 달동네를 올라가면서 시작한다. 여민이의 아버지는 호탕하고 낙천적이며 불의를 참지 못한다. 어머니는 자상하고 지혜롭다. 여민이는 마음이 착하고 주관이 강하다. 가난하다는 것 말고는 어려움이 없다. 그래도 달동네에는 더 못사는 집이 많으니 여민이는 가난하다는 사실 조차 절실히 못 느낀다.
여민이의 하루 하루는 학교 친구, 달동네 사람과 함께 한다. 기종이는 같은 동네에 사는 학교 친구다. 부모 없이 누나와 단 둘이 사는데 약간 모자라는 듯 하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여민이의 뛰어난 싸움 실력에 반해 그를 대장이라고 부른다. 시집가는 누나를 따라 울면서 동네를 떠나는 기종이를 여민이는 잊지 못한다.
장미는 기종이와 정반대의 아이다. 집도 잘 살고 얼굴도 예쁜 여자 아이다. 딴 아이들은 말 조차 못 붙이는 새침데기지만 여민이는 그런 장미가 좋다. 장미 역시 늠름한 여민이가 어느새 좋아졌다. 여민이 집 보다 더 높은 곳에는 움막을 짓고 혼자 사는 토굴 할매가 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불쌍하다며 물을 길어다 주고 안부를 살핀다. 할머니는 그러나 집 나간 지 20년도 더 된 아들을 기다리다 쓸쓸하게 숨을 거둔다. 골목대장 검은 제비의 아버지는 툭하면 술에 취해 가족을 못살게 군다. 검은 제비는 그 아버지가 밉다. 그러나 누가 아버지를 손가락질하면 혼을 내준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깊은 사랑이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리얼리즘 작가인 저자는 이런 이웃과 울고 웃으며 성장하는 아홉 살 꼬마의 이야기를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나갔다. 그림은 약간은 투박하지만, 그래서 더 정겹다. 어느새 잊어버린 우리의 지난 세월과 정경을 이 만화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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