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외국 학자를 국내로 초청해 학술 행사를 여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는 세계화 시대 지식기반사회 건설의 초석일진대 반대할 이유가 없다. 참가자들은 비인격적인 연구 대상과의 고독한 싸움을 잠시 접어 두고 서로를 학문공동체의 성원으로 이해하고 관심사를 교환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와 다른 문법과 화법으로 말하는 외국 학자들을 접하게 되면 학문의 국제교류가 이뤄지게 된다.그런데 적지 않은 학술 행사가 이런 취지를 상실한 채 홍보용이나 과시용으로 전락하고 있다. 주최자의 권력이 클수록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발표가 끝나면 토론을 유도하기보다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청중의 입을 막기에 급급해 한다. 청중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았다가 사라져야 한다.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질문하면 '잘난 체한다' '예의 없다'는 핀잔을 받아야 한다. 어떤 유의미한 의사소통도 없다.
주최측 대표는 막연한 덕담을 기조로 그야말로 '기조 연설'만 하고 발표 시간 내내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다. 학술발표회장에서 학술적 담론보다는 만찬장에서 '정치적 담화'가 훨씬 유용하며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최 측은 만찬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 신경 쓴다.
비싼 비용을 들여 불러온 대가들의 주장을 듣고, 훌륭한 저녁 식사로 학문적 관계보다는 인간적인 관계 만들기에만 골몰하는 학술행사의 청중이 되어 달라는 초청은 왕짜증이 나는 일이다. 그런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은 밤 새워 고스톱을 쳤다가 지갑을 털린 채 돌아서는 새벽길처럼 허망하다.
수 만 달러씩 받고 외국에 나가서 강연하는 잘 나가는 국내 학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기 때문일까? 국산 학자들이 다 못나서일까? 아니다. 저들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세계 학문 시장의 봉 노릇을 그만하고 학문의 무역수지를 따져봐야 할 때이다.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최악의 노동조건과 사회적 차별로 몸도 정신도 황폐화되어 버린 박사 실업자들에게 프로젝트를 주는 것이 어떨까? 분노하는 열정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분명 세계적인 대가들을 능가하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학문적 사대주의'라는 미국이 놓은 '세계화의 덫'을 벗어나는 길이다.
구 승 희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