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1절을 계기로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해묵은 문제이지만 가볍게 넘겨도 좋을 문제는 아니다. 그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해방 정국에서 좌우(左右) 타협을 이끌어 내고자 했던 중간파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다.정부의 입장은 일제 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인정해 1995년 이동휘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적이 있지만, 광복 이후까지 사회주의 색채를 유지한 경우는 서훈 심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주의 색채라는 게 참으로 묘한 것이다. 사회주의 색채를 전면 부정하면서 좌우 타협이 가능했을까? 그렇게 색깔론으로 몰고 갈 것이 아니라 좌우 타협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했느냐 하는 걸 문제 삼는 게 더 온당하지 않을까? 그렇게 열린 자세를 취할 경우 우리는 당연히 '김 구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왜 문제인가?
김 구 선생은 국민적 존경의 대상이다. 정치인들에게 물어보라.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1위는 단연 김 구 선생일 것이다. 정치인들만 그런 게 아니다. 김 구 선생은 이념과 정치적 성향과 남녀노소의 차이를 초월해 많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물론 김 구 선생은 그런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한 가지 발견된다.
김 구 선생이 존경받는 가장 큰 이유는 죽기 전 1년여 동안 보여준, 좌우를 초월한 민족주의의 실천이다. 그는 48년 2월 10일에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방북 등의 활동을 통해 그 선언을 실천에 옮겼다.
그런데 김 구 선생의 이런 선언과 실천은 전형적인 중간파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김 구 선생은 해방 후 내내 이승만 및 한민당 세력과 협력하는 강경 우익 노선을 걷다가 너무도 뒤늦게 중간파 노선에 합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너무 뒤늦음'을 탓하는 목소리는 약하고, 김 구 선생보다 앞서 민족의 타협과 화합을 부르짖었던 정통 중간파 지도자들을 멀리하고 불온시하는 기운은 가득하니 이거야말로 '집단적 위선'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집단적 위선'의 정체는 남북 화해의 '낭만화'다. 우익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가슴으로만 민족주의 정서를 만끽해 보겠다는 이른바 '정의적(情意的) 민족주의'의 발로이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는 '민족주의 비판론'은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비판은 주로 정의적 민족주의만을 겨냥할 뿐 한국인들이 얼마나 분열에 익숙하고 탁월한 재능을 가졌는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분열은 투쟁으로 이어지고 투쟁은 활력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한국인의 몸에 밴 분열주의가 재앙만은 아니었지만 해방 정국의 분열주의까지 긍정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제 분열에 뿌리를 둔 활력의 효용도 수명을 다했다. 중간파를 다시 보려는 진지한 시도를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분열과 대립의 수렁에서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실로 김 구 선생을 존경한다면 가슴과 머리를 합치시켜 중간의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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