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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민족수난의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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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민족수난의 승화

입력
2004.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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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동남아지역에서 호평을 받던 우리 드라마와 영화가 최근 세계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그 대표 주자이다.외국에서 LG, 삼성, 현대 등 우리나라 간판기업들의 광고나 제품을 대할 때 느끼는 자긍심은 매우 크다. 홍콩의 큰 전자제품상점 입구에는 삼성이 만든 대형 평면TV가 걸려있고, 그 옆에는 대문짝만하게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표가 붙여져 있다. 그 주변에 JVC나 소니와 같은 '메이드 인 저팬'이 전시되어 있다. 1980년대 미국시장에서 값싼 '메이드 인 코리아'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애처롭고 안쓰러운 마음을 기억하며 뿌듯한 격세지감을 느낀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와 같은 영화의 성공은 우리가 일구어낸 경제력 뿐 아니라 문화수준을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더욱 마음이 뿌듯하다. 어디 그 뿐이랴? 두 영화의 주제는 근세사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를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민족의 수난사를 세계에 알림으로써, 그것도 선조들이 피 뿌리며 외쳤던 기미년 독립선언문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알림으로써, 세계인들이 한국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이 영화를 대하며 필자는 우리민족의 비참한 고난의 역사가 후대에 이르러 오히려 풍성한 문화적 소재를 제공한다는 또 하나의 역설을 발견한다. 과거의 고난이 현재의 축복이 된 셈이다.

우리만큼 근세사가 파란만장한 민족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36년간 희생제물이 되어 경제적 수탈과 심각한 민족정신의 쇠퇴를 경험하였다. 5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친일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종군위안부, 강제노역, 생체실험과 같은 만행에 대한 죄과도 청산되지 않고 있으니 아직도 일제의 망령이 민족정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해방 후 소수 지식인들 간의 이기적인 이념적 갈등은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자유주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오천년을 함께 살아온 자신의 핏줄을 죽이고 죽는 끔찍한 역사를 만들어 냈다. 이 전쟁 역시 반세기가 지나도록 우리 마음속에 치유되지 않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민족적 수난에 대한 깊은 연민 때문이었으리라.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이민족을 침략한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근세사에 우리가 겪은 수난은 어쩌면 애매하게 당한 수난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 상처가 깊고, 외세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 특히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와 이로 인한 경쟁심과 적개심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근 종군위안부를 주제로 한 모 여배우의 사진화보로 불거진 논란에서도 이러한 민족적 상처가 드러난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필자는 민족수난사가 드리우고 있는 쓰라린 상처와 멍에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미래로 전진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다.

상처의 치유는 과거의 고난이 현재의 영광과 축복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와 같은 영화는 우리의 민족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문화인들이 우리민족의 수난을 주제로 하는 수준 높은 창작물들을 지속적으로 제작하여 세계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주기를 기대한다. 일제의 종군위안부와 강제노역 만행을 주제로 한 영화도 만들고, 해방 후 이념 갈등으로 빚어진 끔찍한 일들과 독재정권 밑에서의 인권탄압을 주제로 한 창작물도 제작하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민족이 당한 수난의 역사가 승화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정 운 오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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