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알로에 인생 김정문 <30> 사랑에 맘 아팠던 시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알로에 인생 김정문 <30> 사랑에 맘 아팠던 시절

입력
2004.03.08 00:00
0 0

'나의 이력서' 덕분에 잊고 지냈던 친지들과 자주 통화를 하게 된다. 엊그젠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주정웅(필명 주 평)이란 오랜 벗이다. 한국일보 미주판을 통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연재를 재미있게 읽는다고 했다.아동문학과 수필로 필명을 날린 그는 통화 말미에 "연애박사 시절 얘기는 왜 안 하느냐"며 농을 걸었다. 연세대 의예과를 다녔던 그는 천성이 어린 아이들을 좋아해 문학을 하느라 중도에 의학 공부를 포기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50년도 훨씬 지난 추억들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그는 통영 고향 친구였다. 나는 폐결핵으로 경성사범학교를 휴학한 뒤 독서로 소일하다 8.15 광복을 맞았다. 그때 통영에서 선생님들이 무료 야간 중학교를 개설했다. 나는 다시 진학의 꿈을 안고 그 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내 실력을 알아본 당시 수산학교 교무주임 박유홍 선생의 도움으로 그 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수산학교에 다니면서 통영교회 학생회를 만들었다. 통영고를 다니던 주정웅과 특히 친했다. 우린 크리스마스 때 연극 '레미제라블' 공연을 비롯한 다채로운 행사를 함께 마련했다. 그 친구가 희곡을 쓴 '사랑의 꽃다발'이라는 연극에선 내가 주인공을 맡았다.

3학년을 마치고 1947년 고려신학교에 입학했다. 1학기를 다닌 뒤 다시 서울의 장로회 신학교(현 총신대)로 옮겼다. 박형룡 박사라는 보수파 신학의 거두가 이 학교를 설립할 때였다. 겨울방학이 되면서 내 미래를 곰곰 따져봤다. 어머니 소원대로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목사가 되기에는 너무 낭만적이고 현실참여 기질이 강했다. 그래서 이듬해 동아대 문학부 2학년으로 편입했다. 학교를 참 많이도 옮긴 셈이다.

수산학교 때는 열 여덟 청춘이었다. 미남이란 말을 곧잘 들었고 공부도 잘해 여자들에게 인기가 꽤 많았다. 대충 10명은 따라 다닌 것 같다. 고려신학교 입학 직전인 스무살 때 결혼했는데 식을 올린 바로 그날 한 여인이 자살 한다고 울고 불고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사흘 뒤에는 편지 한 장이 날라왔다. 아주 유명한 예술가의 따님이 사람을 통해 보낸 편지였다. "죽도록 사랑했고 수십 통의 편지를 썼는데 끝내 보내지 못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이 당신은 결혼해버렸다. 별 도리가 없으니 친구로 지내자"는 내용이었다.

나도 기가 막혔다. 같은 교회를 다녔지만 쌀쌀하기 짝이 없던 그녀가 나를 사랑했다니 놀라웠다. 누군가 '너는 눈치가 발바닥'이라고 한 게 그녀를 두고 한 말 같았다. 그 말은 지금도 맞다. 나는 정말 현실 감각이 둔한 편이다.

사실 나도 그녀를 꽤 사랑했다. 고민도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부산의 신학교로 찾아왔다. 나를 잊을 수 없어 통영여고를 그만두고 부산에 와서 무용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춤에 미쳐 나를 잊겠다고도 했다. 듣자 하니 그녀의 집안에서도 난리가 난 듯 했다.

나는 서울의 신학교로 옮긴 뒤에도 그녀 때문에 잠을 못 이뤘다. 초대 교장을 맡은 박형룡 박사를 찾아갔다. "다른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자라고 했는데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박 박사는 "새가 네 머리 위를 날아가는 건 막을 길이 없다. 허나 네 머리털에 새집을 짓지는 못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내겐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않았다. '죄를 짓지 말라'는 뜻이겠지만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년 후 그녀도 결혼했다. 당시 아내에게는 말 못했지만 마음에서 용솟음치는 무언가를 가눌 길이 없었다.

나는 남녀와 꽃과 대자연, 이웃과 인류에 대한 사랑은 모두 마음의 아름다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걸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의 마음도 아름답다는 뜻이다. 나신의 곡선미를 느끼는 사람의 마음도 아름답다.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욕정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