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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50>악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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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50>악의 제국

입력
2004.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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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은 1980년대 미국인들 다수가 보기에 '악의 제국'이었다. 공개 석상에서 그런 딱지를 붙임으로써 이 말을 저널리즘에 널리 유통시킨 사람은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였다. 1983년 3월8일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전국 복음주의 선교협회 대회에서 연설을 하며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불렀다. 레이건의 이 도발적 발언은 미국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던 전략방위구상(SDI)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별들의 전쟁(스타 워즈) 계획'이라고도 불렸던 SDI는 혹시라도 소련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이를 공중에서 격추함으로써 소련의 핵전력을 무력화하겠다는 것이었다.흔히 신보수주의라고 불렸던 레이건의 정책은 국내와 국외에서 대조적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나라 안에서는 소득세의 대폭 삭감, 복지 정책 축소, 공급 사이드 경제학에 바탕을 둔 국가 개입 최소화 등 '작은 정부'를 지향했지만, 나라 밖에서는 역사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마니교적 이분법에 기초해 외부의 '악'에 대한 징벌을 수행할 수 있는 '큰 정부'를 지향했다. 그런데 이 '큰 정부'가 상대한 것은 소련 같은 '큰 악'만은 아니었다. 인구 10만 남짓의 섬나라 그레나다의 불안한 정정이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그 나라를 침공해 친미 정권을 수립한 일은 레이건의 근엄하고 비장한 권선징악 외교가 지닌 희극성을 보여주었다.

레이건의 정신적 자식을 자처하는 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북한과 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바 있다. 정신적 아버지와 달리 부시가 자신과 대등한 힘을 지닌 '악한' 상대를 지니지 못한 것은 그의 호전주의를 레이건의 경우보다 더 희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 희극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흘림으로 공연되는 참혹한 비극이기도 하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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