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태어났다는 게 행복하게 다가온 순간이었어요." 1인극 '딸에게 보내는 편지'(아놀드 웨스커 작·임영웅 연출) 대본을 덮는 순간 최정원(35)은 밀려 오는 감동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했다. 인생관이 변할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그 감동을 안고 뮤지컬 배우 최정원이 5일부터 무대에 올랐다. '딸에게…'는 1992년 9개월 간 6만명 관객 동원, 1995년 전좌석 예매 등 윤석화가 장기공연을 하면서 흥행 신화를 쓴 극단 산울림의 최장기 인기 레퍼토리다. 연출가 임영웅은 9년 뒤 그 적역으로 최정원을 꼽았다. "너 아니면 누구도 시키고 싶지 않다"며 손짓을 보냈다.
그러나 최정원은 "혼자 100분 동안 무대를 책임져야 한다는 어려움"을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임영웅은 대본이나 읽어보라고 한 발 물러섰다. 최정원은 '렌트' '시카고' '토요일 밤의 열기' 등 18편의 뮤지컬에서 특유의 폭발력과 열정을 보여준 최고의 디바.
그러나 화려한 무대 장치도, 마이크도 없이 홀로 수백 개의 눈동자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건 다른 일이었다. 대본을 밤새 읽은 뒤에야 배우인생 17년 만에 첫 연극 외출에 나서기로 했다. "이건 연기하는 게 아니에요. 밤무대 가수인 서른 다섯의 엄마가 가슴이 커지기 시작한 열한 살 딸에게 편지를 쓴다는 내용은 바로 내가 살아온 삶의 고백이에요. 연습 끝나고 집에 가면 펑펑 눈물이 나요."
'나'는 딸을 사랑하면서도 '족쇄'이기도 한 딸에 대한 애증과 미안한 마음으로 뒤죽박죽이다. '나'가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는 것이 줄거리로 일종의 참회록이다. 조금 심심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다섯 곡의 노래를 갈피마다 끼워 넣고 섬세하게 여성의 심리를 잘 잡아낸 작품이다. 최정원은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 사랑과평화의 '어머님의 자장가', 뮤지컬 '캣츠'의 '메모리', 배인숙의 '사랑스런 그대' 등 자신이 고른 다섯 곡을 극의 리듬과 맞추어 부르기도 한다.
수중 분만으로 낳은 여섯 살 난 딸 수아와 극중 '딸'이 겹치지 않을 리가 없다. "딸이 잠자기 전 혼자 이를 닦고 노래를 부르는 대목에선 울컥해요." 극중 '나'나 최정원 모두 자장가 한 곡 제대로 불러준 적이 없는 엄마다. 그래도 똑 부러지게 자라는 딸 자랑을 한다. "유치원 동요 발표회 때 일인데, 수아 친구들이 절 보고 '수아 엄마'라고 하니까 수아가 '수아 엄마가 아니고, 뮤지컬 배우 최정원'이라 바로 잡더군요."
여성 관객은 '나'와 '딸'의 얘기가 바로 자신의 얘기임을 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싶고, 딸에게 편지 쓰고 싶게 만드는 연극이었으면"하는 게 최정원의 바람이다. 관객에게 편지지를 선물하는 것도 그 이유다. 4월11일까지 산울림소극장. (02)334―5915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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