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대선을 앞두고 미국 노총인 AFL-CIO의 존 스위니 위원장은 "부시 행정부는 3년 동안 상실한 290만개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며 민주당 지지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AFL-CIO가 당면한 '고용위기(job crisis)'의 심각성이 정권교체 요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 차원에서는 이미 지난 해부터 다른 해법이 추진되고 있다. 무한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사용자측과의 단체교섭에서 임금인상 등 복지를 양보하는 대신 고용보장을 확약 받는 동맹체제 구축이 그것이다. 미국의 가장 큰 산별노조인 자동차노조(UAW)의 론 개텔핑거 위원장이 지난해 교섭에 나서며 "이번 교섭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노사의 공생"임을 수 차례 강조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미국노총의 고민
2차대전후 미국의 노조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53년 33%에 이르던 노조 조직률은 하락을 거듭해 2003년에는 13%를 밑돌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 협력적 노사관계 구축 등 노조의 약화를 가져온 사회적 합의를 받아들이면서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등의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했다.
최근에는 시장의 변화가 일방적 노사관계를 부추기는 형국이다. 외국기업과의 경쟁에서 시장지배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는 미국 기업들이 노조를 상대로 생산기지의 해외이전과 비용감축 가운데 택일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실제 수입차의 시장점유율은 1955년 5%에서 1970년 15%, 1979년 22%, 1987년 30% 식으로 크게 확대되고 있다. 여기에다 미국에 현지공장을 차린 일본이나 독일 기업들이 노조를 허용하지 않고 있어 미국 기업 노조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됐다.
노조에 대한 기업들의 양자택일 요구는 "노동비용 감축에 동의하지 않으면 인건비가 싼 해외로 이전할 수 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이나 마찬가지다. 노조는 이를 받아 들고 고민에 휩싸였다. 특히 사용자측은 비용절감 항목으로 의료보험료의 분담을 우선적으로 들고나와 의료기본권을 지키려는 노조가 반발하고 있다.
사용자의 요구와 노조의 반발이 충돌로 이어진 것이 최근까지 5개월가량 계속된 미국 서부의 슈퍼마켓 파업이다. 파업은 알버트슨과 본스, 랠프스 등 3대 슈퍼마켓 체인의 노동자 7만 여 명이 주당 5달러의 의료보험료를 부담하라는 사용자측의 교섭안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식품상업노조(UFCW) 소속인 노조원들의 시위와 파업에 사용자측은 직장폐쇄로 맞섰다. 사용자측은 최근 2년 동안 40% 가까이 보험료가 인상됐다고 주장하지만, 이 지역에 월마트 슈퍼센터가 뛰어들면서 촉발된 경쟁 격화도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이다. AFL-CIO는 파업기금을 마련하는 등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어 타결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노사 공생으로 활로 모색하는 노조
그러나 슈퍼마켓의 사례는 아주 특이한 사례이다. 지난해 알선조정청(FMCS)이 중재에 나선 6,640건의 교섭 가운데 75%인 4,988건은 원만히 타결됐고 나머지의 4분의1도 당사자간 이견을 크게 좁혔으며 파업으로 이어진 경우는 1.5%에 불과했다. 대부분 노조들은 단체협약에서 의료보험을 포함한 복지를 포기하는 대신 고용안정을 약속 받는 식으로 타협을 선택했다.
지난해 체결된 763개의 협약안을 들여다보면 이 같은 추세가 분명한데 우선 노사 합의된 평균임금인상률은 3.1%로 전해의 3.9%에 비해 0.8%포인트 감소했다. 세부적으로는 협약이 적용되는 첫해(단체협약은 3∼5년에 한번씩 체결한다)에 임금을 동결한 경우가 41%나 됐고 인상률이 0∼2%에 불과한 경우도 25%나 됐다. 실제 전미철강노련이 최대 타이어 생산업체인 굿이어와의 단체교섭에서 3년 협약기간 동안 임금을 전면동결하기로 했다. 포드와 GM, 크라이슬러 등 빅3와 협약을 체결한 자동차노조도 1년과 2년째 일괄지급 보너스를 받는 대신 기본급을 동결하는 내용에 사인했다. 의료보험에서도 굿이어는 5%부담을, GE는 18%부담을 받아들였다.
반면 노조는 고용안정에 대한 다짐을 단단히 받아두었다. 통신산업노조는 버라이즌과의 5년 장기협약에서 '단협 적용대상 일자리의 0.7%이상을 타 지역으로 이동시키지 못한다'는 조항을 삽입했고 철강·고무노조도 굿이어와의 협약문에 '14개 공장 가운데 12개 공장은 폐쇄할 수 없다'는 규정을 넣었다.
이에 대해 코넬대학 노사관계학 박사과정의 권순원씨는 "기업이 직면한 가혹한 시장경쟁 현실을 인정한 노조가 비용타협에 나서면서 대가로 고용안정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 결과"라고 풀이했다.
이외에 경영참가로 노사 대타협의 활로를 모색하는 노조도 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노조 쪽의 적극적인 요구보다 경쟁력 저하를 극복하기 위한 사용자측의 요청을 따른 경우로 실질적인 노사관계 변화에는 한계가 많다는 지적이다.
/워싱턴=김정곤기자 kimjk@hk.co.kr
■ 노사공생 실험 "GM 자회사 새턴 모델"
1984년 미국의 전통적 강성 노조인 전미자동차노조(UAW)와 자동차산업 빅3의 하나인 제너널모터스(GM)는 기존의 미국식 노사관계를 뒤흔드는 역사적 실험에 시동을 걸었다. 노조와 경영자가 공동 경영하는 '새턴프로젝트'의 출발이다.
GM이 자회사인 새턴에서 시도한 노사 공동 의사결정 시스템은 참여와 협력을 토대로 노사상생에 성공한 대표적 모델. 노조가 임금 및 근로조건 등의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대신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은 경영자측의 몫으로 돌렸던, 전통적 실리주의를 뒤엎는 시도였다.
새턴의 노사파트너십은 생산라인 매니저부터 최고경영자에 이르는 회사 내 모든 의사결정단계에서, 그리고 경영 전반에서 이뤄진다. 공장 입지 선정, 공정 설계, 기술 선택, 공급업체 선정, 부품의 아웃소싱 여부, 판매업자 선정, 신상품 개발, 예산, 고용, 교육훈련, 생산성 제고, 직무 설계 등을 노사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한다. 최고의사결정기구로서 이사회의 기능을 하는 전략활동위원회(SAC)에는 사용자측과 노조가 공동 참여하고 있다.
새턴은 80년대 소형차를 앞세운 일본 자동차 기업에 시장을 잠식당하며 미국 자동차산업이 전후 최대 위기에 몰린 가운데 GM이 돌파구로 기획한 것. 산업 전반에 대한 위기의식은 경영진뿐만 아니라 노조도 긴장시켰는데 이 같은 공감대를 기반으로 GM과 UAW는 대립적 노사관계를 청산하고 노사 합의 하에 새로운 생산조직 체계로 재편하자고 합의한다.
GM 경영진 대표 45명과 UAW 조합원 대표 54명이 참여한 '99인 그룹'이 결성돼, GM과 UAW의 전국협약과는 별도의 단협을 체결하고 독자적 조직을 갖춘 자회사 새턴을 설립했다. 기존 사업장의 단협은 1,000여 페이지에 달한 반면 새턴의 경우 단 몇 페이지에 '노사 공동결정'의 기본정신만 명기할 정도로 노사간에 혁신적 신뢰를 형성했다. 새턴은 생산 개시 3년 만인 93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며, 미국자동차산업 부활의 첨병 역할을 해냈다.
새턴 이외에 AT&T, 제록스, 코닝 등 일부 고성과 기업이 도입한 공동 의사결정 방식의 노조 경영 참여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획기적 변화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즉 노조가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노동자의 이해를 일정 부분 반영하는 대신 생산과정에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 기업은 노동 생산성 향상 및 시장경쟁력 강화라는 실리를 챙기는 것. 전통적인 대립적 노사관계 지형이 뿌리깊기 때문에, 그나마 이 같은 시도는 대부분 일부 작업장 단위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별 기업 단위를 뛰어넘어 지역 단위의 노사협력 모델이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노조와 사용자가 업종단위 협력체를 구성하고 지자체 등 공공부문과 공동으로 노동자를 위한 직업 훈련 및 취업지원 제도를 만들어낸 위스콘신주 노사정 업종별 협의 모델이 대표적이다. 뉴욕의 직물산업 노동자 교육프로그램, 오리건주 건설업 노동자 프로그램, 샌프란시스코 호텔업계 종사자 프로그램 등 지역 차원의 노사협력이 여러 곳에서 시도되고 있다.
/문향란기자 iami@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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