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 XX학번 아무개' 이런 식으로 소속과 이름이 나열된 대형 현수막이 대학 건물 벽에 걸려있다. 각종 시험에 합격한 졸업생과 재학생 명단이다. 각 대학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내걸고 있어 대학 캠퍼스에서 이 같은 풍경을 보는 것은 이제 전혀 낯설지 않다. 오히려 눈에 안 띄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수년을 준비해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으니 축하할 만하다. 학교로서도 자랑스러울 것이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외환위기가 가져온 큰 변화 중의 하나가 평생 직장 개념의 소멸이다. 평생 직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평생 직업으로서 선호되는 것은 역시 국가가 인정하는 것들로, 국가 고시를 거쳐야 한다. 게다가 청년실업 문제는 좀처럼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학을 졸업해도 변변한 일자리 구하기가 몹시 어려운 판이다. 그런 측면에서 '축 합격'이라는 대학의 대형 현수막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돌아서는 순간 마음은 편치가 않다. '대학이란 곳이 이런 데는 아닌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매년 되풀이되는 것이지만, 올해도 각 대학 수강신청 결과가 눈길을 끈다. 취업이나 '웰빙' 관련 과목은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반면 인문·자연학 분야 교양 강의들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수강신청 1분만에 마감된 과목이 있는 한편에서는 인원부족으로 폐강하는 과목이 속출하고 있다. 인문학 위기는 이미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이공계 위기가 심각하게 거론된 데 이어 이제는 교양붕괴의 가속화를 우려해야 하는 때가 됐다. 대학간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대학이 학생들의 요구에 적극 대응해야겠지만, 대학 스스로 '취업 전문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일본의 평론가 다치바나 다케시가 얼마 전 '뇌를 단련하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도쿄대 교양학부에서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이 책에서 그는 "젊을 때 최대한 많은 사상적 외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살 무렵은 어떤 편견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나이이므로 이 시기에 많은 정신적 외도를 해야 사고도 유연해지고 그에 따라 삶도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대학 담장 너머는 곧 전선과 같습니다. 전장에 비유하자면 참호 속을 기어 다니며 24시간 내내 총을 쏴야 하는 현장입니다. 매일 전사자가 나오는 현장이지요. 4년 뒤 그런 곳에 투입될 각오가 돼 있습니까"라고 그는 묻는다. 다시 새 학기다. 우리 대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상호 논설위원 sh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