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사태는 내게도 가혹했다. 이미 도산의 아픔과 세무조사 등 산전수전을 두루 겪은 터였지만 IMF는 또 다른 위기였다.타이밍도 좋지 않았다. 나는 IMF의 칼 바람이 이 땅을 얼어붙게 만들기 두 달 정도 전인 1997년 여름 (주)김정문시스템이라는 다단계 판매회사를 만들었다. 이게 화근이었다.
당시 일주일에 두 세 차례 전국 순회 강연과 방송 출연 등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핑계 같지만 바쁜 탓에 다단계 판매에 대한 충분한 연구·검토 없이 무턱대고 도입하는 우를 범했다.
회사 매출은 다단계 판매 도입 2개월 만에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IMF와 겹친 탓도 있지만 방문판매로 체질이 굳어버린 전국 300여개의 지사와 대리점, 주부사원 조직이 움직이지 못한 영향이 더 컸다. 나는 서둘러 방판 체제로 되돌렸다.
사태는 긴박했다. 판매조직 재건은 별무리 없이 진행됐지만 뜻하지 않은 IMF 한파로 판매는 다시 격감했다. 급기야 운영자금마저 턱없이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 동안 판매 조직을 철저히 이념화시켰고 최고 품질의 제품을 보급해왔다. 그런데 축적된 자금은 거의 전무했다. 그때도 나는 전셋집에 살았다. 강남에 근사한 사옥 하나 사두라는 주변의 권유는 묵살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현금 없이 무방비 상태로 근근이 버티다 이듬해 4월 자회사인 (주)푸른화장품이 부도를 맞았다. 상호보증이 돼 있는 (주)김정문알로에도 무자비한 자금 공세에 시달렸다. 풍전등화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전국의 금융 전산망은 김정문알로에까지 '사고회사'로 규정했다. 대출 연장은 커녕 푸른화장품에 보증 선 빚을 갚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연쇄 부도를 막기 위한 피 말리는 전쟁이 몇 달째 이어졌다.
부자재 납품업체의 결제 요구는 물론 밀린 급여와 퇴직금을 먼저 처리해달라는 일부 직원들의 항의는 내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는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꼈고 납품업체에 대해서도 후한 인심을 보였다. 그러나 세상은 내 뜻과는 달랐다. 어제의 동지 대부분이 적으로 돌변하는 현실이 냉혹할 뿐이었다.
그러나 불퇴진의 용기와 합리적 논리로 무장한 나는 어떤 싸움이든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는 낙천적인 성격도 든든한 무기였다. 그리고 내겐 무엇보다 '조직'이 있었다.
전국의 판매 조직들은 회사를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어음과 수표 부도를 막기 위해 물건을 받기도 전에 회사에 대금을 먼저 지불했다. 목숨과도 같은 돈이 종이 쪼가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우리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했다.
세무조사 때처럼 지인들도 나섰다. '김정문알로에만은 살려야 한다' '정의를 실천해 온 역사에 남을 만한 기업이다' 등이 그들의 내세운 구원의 변이었다.
이처럼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 도움으로 푸른화장품은 임의화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98년 가을에는 회사의 여신규제도 풀렸다. 지금 생각해도 나와 인격적으로 형제같이 지냈던 그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부도 기업주가 채권자와의 대화를 통해 화의하는 방식인 임의화의는 우리나라에서 푸른화장품에 처음 적용됐다고 한다.
나는 우리 민족이 왜 IMF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지 곰곰 따져보곤 했다. 대기업과 식당 미용실 등 무려 5만개 사업장의 문을 닫게 한 IMF는 왜 왔는가. 그 뿌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정경유착과 공룡 재벌의 폐해라고 생각한다. 개발독재의 산물인 독점적 재벌은 스스로 경쟁력을 쌓기 보다 뇌물과 특혜라는 손 쉬운 방법을 택해 성장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IMF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때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듣게 된다. 차떼기로 대변되는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은 비자금이라는 제목으로 연일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있다. 기업은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는 나의 경영철학이라도 정착되길 바라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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