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월3일, 숫자 '셋'이 둘 겹친 날이다. '셋'에 대한 인류의 명상은 역사가 길다. 삼위일체를 원리로 내세우는 정통 기독교에서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피타고라스 학파나 플라톤 철학에서도 이 숫자는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다. 사실, 사람들이 셋이라는 숫자를 거룩하게 여기는 것이 별난 일은 아니다. '셋'은 공간(3차원)과 시간(과거·현재·미래)과 행위(시작·중간·끝)와 가족(아버지·어머니·자식)과 논리(정·반·합)와 개인사(태어남·삶·죽음)와 세계사(창조·세계·종말)의 구조를 이루는 숫자이니 말이다.거의 모든 종교에서 '셋'과 관련된 상징 개념들이 발견된다. 예컨대 힌두교의 브라마와 비쉬누와 시바,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이시스와 호루스, 그노시스파의 정신과 말씀과 지혜, 기독교의 성부와 성자와 성신, 우리 건국 신화의 환인과 환웅과 환검(단군왕검) 따위가 그렇다. '셋'은 더러 세속에서도 펄럭인다. 유럽의 이 구석 저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삼색기들을 보라.
사람들이 분열과 이원성과 마니교적 양분법을 치유하는 것은 숫자 '셋'을 통해서다. 숫자 '셋'은 대립되는 한 쌍에 새로운 차원을 보탠다. 선과 악이라는 본원적 대립을 선도 악도 아닌 참(眞)은 가볍게 초월하면서 참과 거짓이라는 새로운 대립을 창출해낸다. 참과 거짓 사이의 대립을 참도 거짓도 아닌 미(美)는 간단히 초월하며 미와 추라는 새로운 대립을 만들어낸다. 위험한 양분 상태를 초월하거나 두 극단의 균형을 잡아줌으로써 '셋'은 모든 성스러운 것을 저절로 구현하는 판박이 숫자가 되었다. 그것은 신의 숫자이고 사제의 숫자이며 희생의 숫자이고 헌주(獻奏)의 숫자다. 그것은 민중의 숫자이기도 하다. 고금동서 가릴 것 없이 동화에는 흔히 곰 세 마리나 화살 세 개가 나오고, 노래에는 흔히 북 세 개와 어린아이 셋이 나온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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