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각종 세계대회를 휩쓸며 한국 양궁을 반석에 올린 '신궁' 김진호(43·한체대 체육학부 교수)는 각별한 인연을 꼽아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한참을 망설였다. 세계 정상까지 올랐던 사람에게 인연이 없을 리 없겠지만 "너무 많은 분들이 있어 어느 한 사람을 꼽기가 더 힘들다"는 말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86 아시안게임 육상 800m 금메달리스트인 김복주(44) 한체대 체육학부 교수를 떠올렸다.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로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비슷한데다 지금도 가장 가까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두 사람 사이에는 김진호의 태릉선수촌 선배이자 김복주의 부인인 김수옥 전 테니스 국가대표 선수가 있다.
김진호가 김복주를 처음 본 것은 1979년 무렵 태릉 국가대표 선수촌. "까맣고 깡마른 모습이었지요. 식당에서, 훈련장에서 마주치면서 친해졌지요." 종목은 달랐지만 같은 경상도 출신에 학년도 같아 김진호가 86년 태릉을 떠날 때까지 7년 여를 친구로 지냈다. 여자 기숙사 같은 층에서 김진호와 친하게 지냈던 김수옥 덕분에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힘들 때 함께 고생한 친구가 오래 간다는 말처럼, 두 사람의 우정은 별난 에피소드는 없지만 일반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군대 동기 같다고나 할까. 치열한 선발전을 뚫고 들어와 자부심도 남다른 대표팀 선수들이지만,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와 '창살 없는 감옥'이라 할 정도로 꽉 짜인 고된 훈련과 외박증을 끊어야 나갈 수 있는 통제된 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다. "남들에 비하면 태릉 생활을 좋아했다"는 김진호지만 일 년에 집에 가는 일이 한두번 뿐이었다. 김진호는 한마디로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한 사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김진호는 95년 나란히 한체대 교수로 임용돼 '입사 동기'로 다시 만난 김복주에게 남다른 유대를 느낀다. "교수 임용 면접장에서 거의 10년 만에 다시 만났어요. 살이 찌고 나이든 모습에 서로 놀라면서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대표팀을 떠나 뒤늦게 공부에 매달려 막 사회에 첫 발을 디딘 신참 교수라는 비슷한 상황도 서로에게 적지 않은 의지가 되었다. 덕분에 둘은 편하게 "한마디만 하면, 척 알아 듣는 사이"다.
김진호는 김복주를 보면서 지도자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 뛰어난 선수가 꼭 뛰어난 지도자가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절감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되도록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김진호는 지도자로서는 김복주가 훨씬 유능하다고 인정한다. "학생들을 보면 그 선생을 알 수 있잖아요. 김복주 선생이 가르치는 중장거리 팀은 학교 안에서도 인사성 좋고 요령 부리지 않기로 소문났어요. 물론 성적도 좋구요."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부지런함과 여유를 겸비한 김복주를 보면서 더 노력해야 한다는 자극을 받는다.
김진호는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어가는 나이 탓에 김복주와 대표팀 코치로 다시 태릉에서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20년쯤 후 비슷할 때 학교를 떠나며 좋은 선수, 좋은 지도자였다는 소리를 함께 듣는 50년지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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