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적 노사관계'는 기업별 노동조합, 연공에 의한 승진과 승급, 종신고용, 사내 교육훈련, 사내 복리후생제도 등으로 구성된다. 현재 일본적 노사관계가 바뀌고 있다는 말의 실질적 의미는 연공제와 종신고용의 관행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은 제1차 석유파동(1973)의 충격으로 경제성장률이 정체되면서 시작된 고용조정에서 찾을 수 있다.일본의 노사는 공채 출신의 표준형 정규 종업원의 고용을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대신 여사원, 무능력자, 고령자, 비정규직이나 하청기업 종업원을 해고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는 핵심적 역할을 하는 기간요원을 확보하고 이들에게 일본적 노사관계에서 제공되는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나머지는 이들을 바라보며 기업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경쟁하고 충성심을 발휘하는 분위기가 만들어 졌다. 인원이 더 필요해지면 자사나 계열사 내부에서 남는 사람을 재배치해 쓰거나 파트타이머와 같은 비정규직 종업원을 채용했고, 정규직 종업원의 신규 채용은 극도로 억제했다. 이것이 불황 속에서 기업이 조직의 통합력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고용조정의 결과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종업원의 신진대사가 되지 않으니 1980년대에 들어서는 사회보다 기업에서 먼저 고령화 문제가 발생했다. 승진을 시킬 자리가 없으므로 억지로 '부'나 '보좌'와 같은 수식어가 붙은 관리직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부하가 없는 명목상의 관리직이 늘어가니 노동조합은 위축돼 갔다. 해고로 인한 손실은 노사가 모두 피하고 싶었으므로, 정년은 보장하고 연공제는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 말까지는 일본 경제가 양호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문제가 외부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거품경기가 꺼지고 1990년대의 장기 불황이 시작되면서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알려져 있던 은행, 증권사를 비롯한 금융권의 화이트칼라가 집단 해고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즉 실업자가 늘어났다는 것보다, 회사가 사원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일본적 노사관계의 신화를 일반인들이 믿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상징적 의미가 중요하다.
'회사인간'이 양호한 고용조건을 누리는 동안 비정규 종업원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제1차 석유파동을 겪고 난 1970년대 후반 이후 '경제의 소프트화'가 진행돼 서비스 산업이 확대되고 있었다. 서비스 부문에서는 시간대와 계절에 따라 노동력 수요가 급격하게 달라지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제조업에 기반을 둔 기존의 노사관계 제도와 어울리지 않는 단시간 취업자나 임시직 종업원의 비중이 늘어나게 됐다. 서비스산업 종사자 가운데는 가사와 취업을 양립해야 하는 주부 파트타이머의 비중이 높다. 생산노동자의 규모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규 고용이 비제조업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제조업 부문에서도 비정규 종업원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비정규 종업원에게는 회사보다 '지역'과 '가족'이 중요하게 마련이다.
회사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문제는 고령화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15% 정도인 일본의 고령화 수준은 아직 다른 선진국보다는 낮은 편에 속하고 있지만 진행 속도는 빠른 편이다. 고령화 시대에는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도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따라서 고령자에게도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고 생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기업 조직에 매몰돼 있던 퇴직자들은 가족과 지역사회에서도 이미 낯선 타인이 돼 있다. 즉 고령자가 새로운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재사회화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할 필요가 생겼다. 또한 이들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는 정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기본적으로 고령자 개호(介護·시중들며 하는 간호)에 대한 공공 부문의 개입을 줄이고 가족, 지역사회가 보다 많은 책임을 담당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가족과 지역사회의 책임은 고령자 개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회복지 전반에 걸쳐 강조되고 있으나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대두 된다. 이미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진 공동체적 연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가 그 것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고령자를 돌보는 것도 어렵지만 출산율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고령화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화 사회의 도래는 결국 모든 사회 구성원이 새로운 종류의 생활 방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생활의 희생, 기업과 조직에 대한 충성, 생산성 향상 등과 같이 시장 경쟁에 이기는 것을 높게 평가하는 가치관에서 벗어나 이웃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소중하게 여기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일본의 직장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결국 '회사'가 개인의 인생에서 가지는 의미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으며, '지역'과 '가족'의 중요성이 새롭게 일깨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종 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50세 ▲서울대 사회학과 졸, 일본 도쿄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저서-일본의 지방자치와 노동행정(한국노동연구원) 등
■ 日 "프리타 400만명 시대"
최근 일본에서 사회적 관심사로 급부상한 용어가 있다. '프리타'라는 일본식 신조어이다. 일본 내각부가 2003년 발간한 국민생활백서는 '디플레이션과 생활―청년 프리타의 현재'라는 부제를 붙였을 정도로 일본 사회의 키워드가 됐다.
원래 이 용어는 80년대 등장했다. 속박이 싫어 과감하게 정식 직업을 포기한 젊은이들, 일본식 영어로 '프리 아르바이타'(free arbeiter)를 부르기 쉽게 줄여 만든 용어이다. 프리타는 모범 '회사인간'들이 이끌어가는, 잘 짜여진 일본 사회가 파생한 일종의 반항아들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장기불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식 직업을 갖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프리타의 범주에 포함됐다. 내각부가 '학생과 주부를 제외한 15∼34세의 임시직 노동자와 일할 의욕이 있는 무직자'를 프리타로 정의한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각부에 따르면 2001년 현재 프리타는 417만 명에 이른다. 지난 10년 동안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내각부가 이례적으로 지난해 백서에서 프리타 문제를 다룬 배경에는 이 같은 상황의 심각성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 사회는 프리타의 급증 현상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다. 단순 작업에 종사하는 프리타는 고도의 직무능력을 습득하지 못하게 되고, 이것이 일본 전체의 생산성 저하로 연결된다. 낮은 임금 때문에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결혼과 출산이 어려워져 소자(少子)화를 가속한다. 또한 일반 기업 정사원과의 임금격차로 사회 계층화를 심화시켜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프리타의 존재는 전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프리타라는 새로운 직업형태는 일본 청년실업의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으며, 많은 기업들이 프리타의 저임금 덕분에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비스업계 등에서는 프리타가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됐다는 것이 경제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최근 프리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대처에 나선 일본 정부를 난처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김철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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