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관객들에게 여인들의 이야기는 뭔가 내밀한 그 무엇을 엿들을 것만 같은 호기심을 준다. 어린시절, 누나들의 소곤거림에 귀 기울였던 기억을 환기시킨다고나 할까? '8명의 여인들'(사진)에, 그 제목만 듣고도 왠지 모를 관심이 가는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프랑스의 내로라 하는 신구 여배우들을 망라하며 의문의 살인사건을 가운데 놓고 펼쳐지는 이 영화는, 언뜻 보면 범죄 미스터리 영화다.전직 스트립걸인 고모, 주인 아저씨와 그렇고 그런 관계인 하녀,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가정부, 거짓말쟁이 외할머니, 남편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엄마, 노처녀 이모, 혼전 임신으로 고민하는 언니 그리고 막내딸 등 총 8명의 여인들. 여기서 프랑소와 오종 감독은 장르 영화의 탈을 쓰고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독특한 여성공동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범인색출에는 큰 관심 없는 듯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얽히고 설키며 뜨개질 되는 이야기는, 결국은 온갖 '은밀한 사랑들'이 뒤범벅된 유쾌한 멜로드라마다.
여성 커뮤니티를 다룬 영화들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장르영화의 틀 안에 감추다가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어쩌면 이처럼 은근한 방식이 재미일 수도 있겠지만).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대표적인 영화다. 개봉 당시 두 여인의 우정을 그린 감동 스토리 정도로 알려졌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만만치 않은 섹슈얼리티를 지닌 작품으로서, 레즈비언 공동체 내에서는 꽤 진지한 텍스트로 통하고 있다(여러 보수단체에서 추천 영화목록에 이 영화를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편 '델마와 루이스'는 액션 로드무비의 형태를 통해 두 '일탈녀'의관계를 그린 영화. 맨 마지막에 손을 꼭 잡은 두 여자가 절벽 아래로 차를 모는 부분은 '죽음을 같이 하는 사랑'의 명장면이기도 하다.
'바그다드 카페'의 몽환적 분위기도 잊을 수 없다. 어디선가 굴러들어온 뚱뚱한 여자는 사막의 카페에 꽃을 피우고, 삶의 모든 고통을 안은 듯 찌든 얼굴로 살아가던 흑인여자는 새로운 인생을 만난다. '그들만의 리그'는 2차대전 당시 활약했던 여성 야구선수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냉대를 견디며 끝내 승리를 거두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굳이 섹슈얼한 코드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여성들의 연대감을 통해 그들의 교감과 끈끈한 그 무엇을 드러낸다.
하지만 여성들의 이야기 중에 가장 꿀꿀하면서도 리얼하게 다가왔던 영화를 굳이 외국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에겐 임권택 감독의 '티켓' 같은 영화가 있으니까. 항구의 허름한 다방에 네 여인이 모였다. 마담 언니와 미스 양, 미스 홍 그리고 막내. 모두 남자에게 속고 버림받는다는 공통점을 지닌 그들이 영업 끝난 다방에 앉아 깡소주를 마시며 삶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장면은(특히 김지미의 연기는 압권!) 내가 스크린에서 만난 여성들의 이야기 중 가장 가슴을 치던 절창이었다. '아프리카'나 '울랄라씨스터즈'도 '티켓'을 조금만 '베꼈다면' 좋았을 것을…. 늦은 감 있지만,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김형석·월간스크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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