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풍'(싸움 바람)이 분다. 학교 내에서 학교 밖에서, 중·고교생은 물론 초등학생도, 남학생에서 여학생까지, 때와 장소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로마시대 검투사 마냥 누가 더 센지 승부를 가리기 위한 무의미한 '싸움 파티'가 계속되고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짱'은 영웅으로 통한다. 더구나 힘과 권력의 상징인 쌈짱은 짱중의 짱이다. 청소년들이 왜곡된 영웅상에 다가가기 위해 오늘도 주먹을 휘두르며 연습에, 그리고 실전에 몰두하고 있다. 싸움이 마치 스포츠의 일종처럼 자리잡고 있다.'쌈에 의한, 쌈을 위한, 쌈만의…'
서울 S고 1학년 중에서 쌈짱으로 통하는 김모(16)군은 최근 P고 1학년 최모(16)군으로부터 이메일로 결투 제의를 받았다. "누가 더 센가 겨뤄보자"가 요지. 김군은 약속장소와 참관인 명수를 정한 뒤 최군을 만났다. 으슥한 장소로 가서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서로 주먹을 교환했다. 최군이 코피를 흘리며 등을 돌리자 심판들에 의해 싸움이 끝났다. 이 결과는 곧 인터넷을 통해 전파됐다.
김군이 학교 짱에 오르기까지 주먹 꽤나 쓰는 친구들과 숱한 승부를 겨뤘고 이를 위해 실전과 다름없는 맹연습을 했다. 연습상대는 인터넷을 통해 구한 뒤 격투기용 글러브를 끼고 싸움판을 벌였다. 김군은 "남자답고 멋있잖아요"라며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내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서고, 승전보가 알려지면 친구들의 대접도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고 싸움을 자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 K중 3학년 이모(15)군은 같은 반 친구 김모(15)군과 '맞장 뜨기'(일대일로 겨루기)를 했다. 이군의 눈 주위가 찢어지면서 싸움은 끝이 났고, 이군은 병원에서 3바늘이나 꿰맸다. 이군은 "당하고만 있으면 영원히 놀림거리가 되기 때문에 질 줄 알면서도 오히려 살아 남기 위해서 싸움에 응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청소년 사이에 싸움은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다. 순위를 가리기 위해서 싸우고, 사소한 시비에도 해결책은 싸움뿐이다.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으면 왕따 신세를 면키 어렵다.
주로 약자에 속했던 중학생 최모(15)군도 인터넷 싸움 동호회에 가입, 선배들에게 하루 2∼3시간씩 킥복싱을 배우는 등 맹연습을 계속했다. 아침마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감고 40여분간 동네를 돌며 힘을 길렀고 실전 경험도 쌓았다. 최군은 "맞기만 할 땐 몰랐는데 힘을 기르고 기술도 배웠더니 이제 싸우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최군은 반에서 '짱급'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쌈풍은 초등학생과 여학생에게도 불고 있다. 최근 한 인터넷 카페 회원의 주도로 열린 실전연습에는 여학생 7명도 참가했으며 이들도 남학생과 같은 방식으로 싸움판을 벌였다. 한 여중생은 인터넷 게시판에 "여자들은 싸움을 아무리 잘해도 상대방에게 머리카락을 잡히기 마련이라 머릿결이 상할까봐 걱정"이라며 "머리카락을 잡히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질문도 띄워놓았다.
쌈풍 부추기는 사회문화
TV와 영화, 인터넷 케이블 TV가 쌈풍의 근원지다. 연일 이종격투기 K1 등 격투기 중계가 방영되고 있으며 인기리에 개봉된 국내 영화도 학생들의 싸움을 집중 조명하거나 싸움을 미화한 내용 일색이다. 학부모의 왜곡된 보호본능도 쌈풍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쌈풍을 부채질하는 것은 인터넷. 싸움과 관련된 수십개의 각종 사이트가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다. 싸움의 전략을 공유하고 서로의 연습상대도 구해 '그들만의 리그'를 벌인다. 한 카페는 회원 수만도 수만명에 이른다. 싸움의 각종 비법과 발차기 주먹공격 등 기본적인 내용이 제시돼 있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또 정신자세 편에서는 '어디를 공격할 것인가' '적의 눈을 보라' '동정을 구하지도 베풀지도 마라' '싸움을 할 때는 짐승이 되고 적을 짐승으로 간주하라' 는 식의 섬뜩한 내용도 올라와 있다.
학교 밖에는 태권도 유도 권투 검도 등 전통적인 격투기 도장 외에 킥복싱(태국) 무에타이(태국) 카포에라(브라질) 등 외국에서 건너온 무술도장들도 속속 문을 열고 있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자기 보호를 위해 보낸다고 하지만 오히려 학생들의 폭력성향이 커지는 부작용도 있다. 검도 학원에 다니는 K초등학교 5학년 이모(11)군은 "전학을 왔더니 다른 아이들 텃세가 심해 싸움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학원에 다니게 됐다"며 "부모님은 남한테 맞지 않을 정도만 배우라지만 내가 먼저 때리지 않으면 당한다"고 말했다. 킥복싱 학원을 운영하는 모 관장은 "최근 1, 2개월새 킥복싱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학생들이 배로 늘었다"며 "많은 학생들은 자기 단련을 위해 학원을 찾는 건지 격투기술만 연마하려는 건지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신재연기자 poet333@hk.co.kr
■교사들이 말하는 교내 실태 "학생들 조폭문화 답습"
일선 교사들은 한결같이 현재 폭력문화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단지 교사들의 힘만으로 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측면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학교 폭력문제를 담당하는 서울 A중 전모 교사는 "각종 무술 도장이 생기고 이종격투기가 인기를 끌면서 싸움이 더 심해진 것 같다"며 "서열을 정하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싸움을 시작해 중 1, 2학년 때 최고조에 이르고 고교생이 되면 이미 학생들간의 서열이 정해져 싸움 횟수는 크게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서울 B고 폭력상담 담당인 김모 교사도 "일부 불량학생들 사이에만 존재했던 폭력문화가 이젠 모범생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 뒤 "학생들이 폭력문화에 많이 노출되다 보니 거칠어야 멋있다고 생각하는 폭력 중심적 사고가 형성돼 있다"고 걱정했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이 조폭문화를 답습하고 있는 것. 김 교사는 "서열이 정해지면 초등학생부터 고 3까지 단계적으로 긴 상납의 고리가 만들어진다"며 "피라미드형 구조의 맨 꼭대기에 있는 '특짱'은 한달에 돈을 300만∼400만원 이상을 걷는다는 소문도 있다"고 전했다.
폭력문화의 심화는 학생들을 통제할 만한 교권이 추락할 대로 추락한 데다 폭력을 대체할 새로운 문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란 지적이 많다. C중 현모 교사는 "과거에는 힘으로 폭력을 억눌러왔지만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났다"며 "교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학교의 힘으로 폭력문화을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중앙대 청소년학과 임영식 교수는 "자신들의 행동이 폭력임을 주지시키고 남과 내가 다를 수 있다는 다원주의적 문화를 배우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며 "올 7월부터 시행되는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이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시행되도록 하는 일이 폭력문화를 근절시키는 작은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윤기자daln6p@hk.co.kr
■인터넷 싸움카페 운영자 "외부의 비판 신경 안써"
"약자를 강자로 만들고 강자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모임의 목적입니다."
인터넷 카페인 전국싸움꾼연합 회장인 김성태(21·대학생)씨는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싸움관련 카페들이 폭력문화를 조장한다는 일부 시선과 선을 그으려고 노력했다. 김씨는 "서로 싸움기술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괴롭힐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다.
회원수가 4,300명인 전싸련은 같은 종류의 카페 가운데 중간급. 하지만 이 카페는 회장, 부회장, 전국 지역 지부장 등으로 이어지는 전국적인 조직을 회원들의 지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으며, 소수정예 전략으로 운영되는 특징이 있다. 회원들은 대개 10대 청소년들이다.
전싸련은 일부 언론에 보도돼 물의를 일으켰던 대련 정기모임을 아직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김씨는 "모임 초창기에는 단순한 친목도모와 정보교류용 이었지만 최근에는 대련에 대한 회원들의 요구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회원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질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투표를 한 결과 응답자의 37%가 '맞짱'을 선택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전싸련도 곧 대련 모임을 가질 계획이다. 김씨는 "각 지역 지부장 및 회장들을 뽑는 것도 모임을 갖고 대련을 갖기 위해서"라며 "조만간 전국적인 정기 모임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최근 폭력문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적 시선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지만 너무 삐딱하게만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김씨는 "대련을 함부로 열지는 않을 것"이라며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움기술을 단련시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영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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