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3·1 만세운동 85주년을 맞는다. 올해는 또 일제 강점 94년, 광복 59년이 되는 해다. 일제 36년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정리하기에 충분한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일제 36년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역사다. 국회는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광복한 지 59년이 지났는데 친일 규명이 아직도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으니 '민족정기'란 말이 부끄럽다.
친일 규명 특별법 제정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다. 지금까지 친일 규명을 제대로 못했으니 늦었지만 철저하게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이제 와서 무슨 특별법이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친일 규명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정부나 국회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생각하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찬반 양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특별법 제정이 정치화하고 있다는 우려다. 세상만사가 국회에만 가면 정쟁거리가 되는데, 친일규명마저 정치적 계산으로 오락가락해서는 안 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우려는 26일 밤 법사위에서 적나라하게 현실로 나타났다.
친일 규명 법안은 법사위에서 낯뜨거운 수정과정을 거쳤다. 한나라당은 법안 내용 중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란 조항에서 '장교'란 표현을 '중좌 이상'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정치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할 수 있었던 계급은 현재 중령에 해당되는 중좌 이상으로 봐야 한다."
"일본 군대에서 중좌 이상의 계급에 올랐던 한국인은 한 사람도 없다. 일제시대에 육사를 나와 장교로 복무했다면 친일행적이 짙다고 봐야 한다."
"법안 자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 박정희 계급이 일본군 중위였으니까 장교란 표현을 쓴 것 아니냐."
"민족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당리당략적 의도가 있다. 한나라당 주자로 부상하는 박근혜 의원에게 충격을 주려는 것 아니냐."
"거짓말 마라. 당신은 역사의식도 없느냐."
이런 한심한 공방 끝에 '장교'를 '중좌 이상'으로 고치는 수정안이 찬성 5(한나라당) 반대 2(열린우리당) 기권 1(민주당)로 법사위를 통과했다. 25년 전에 죽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오늘의 정치 판세에 미칠 영향 때문에 '중좌이상' 이라는 희한한 규정이 삽입됐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끝내 이 법안의 본회의 상정에 반대, 2일 국회 회기만료와 함께 법안이 자동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 하더라도 한나라당은 과반수 의석으로 부결시킬 수 있다. '중좌 이상'이라는 구차한 주장을 펼 게 아니라 "광복 59년이 지난 오늘 무슨 특별법 제정이냐"고 당당하게 반대했다면 오히려 명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발의자들도 순수성을 의심받고 있다. 이 시점에 친일 행적을 파헤치려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풍설이 시중에 나돌고 있다. 친일이냐 반일이냐는 흑백논리로 역사를 심판하려 한다는 비난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 법안에 의하면 국회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위원들로 '친일 반민족 진상규명 위원회'를 구성하고, 3년 간 자료 조사와 보고서 편찬을 하게 되어 있다. 일제 36년 간 각기 다른 입장에서 벌어진 행적을 어떤 기준으로 조사하고 평가할 것이냐는 판단은 간단하지 않다. '코드'위주로 선발된 위원들이 다수 포진하여 '386식 분류'로 친일 반일을 가를 경우 또 하나의 역사 왜곡이 될 위험이 높다.
내년이면 광복 60년인데, 진정한 역사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 친일파들은 떵떵거리며 사는데,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가난을 대물림해 온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상황은 역사의 진실 규명과 청산을 감당할 균형감각을 잃고 있다.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순국한 18세의 유관순 열사를 생각한다면 역사 규명까지 정치화하려는 불순한 짓을 멈춰야 한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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