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도 웃고, 패자도 웃었다. 대기록으로 가는 길은 힘들었지만 승자는 그만큼 기쁨이 컸고, 패자는 명승부로 승자의 기록달성을 더욱 의미있게 만들었다.삼성화재가 배구사를 새로 썼다. 삼성화재는 29일 대전에서 열린 배구 KT&G V―투어 5차 대회 결승에서 현대캐피탈에 3―2으로 힘겹게 역전승을 거뒀다. 이로써 삼성화재는 1∼5차 대회를 모두 석권하며 2001년 이후 70연승을 기록, 한국배구 사상 최다연승 기록을 세웠다. 종전 최고기록은 여자부 LG정유가 세운 69연승.
이날 경기는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김호철 감독의 '실미도식' 특별훈련으로 무장한 현대캐피탈은 확실히 과거와는 달랐다. '높이'와 투지를 앞세워 대어를 낚을 뻔했으나 다시 한번 막판 집중력 부족으로 분루를 삼켰다. 삼성화재는 대기록 작성을 의식한 때문인지 초반에 고전했지만 3세트 이후 수비조직력이 살아나며 특유의 응집력을 과시했다. 삼성화재 장병철은 혼자서 무려 42점을 뽑아냈고 석진욱은 무릎부상에도 투혼을 발휘, 70연승 달성의 양축으로 활약했다.
현대캐피탈은 1세트에서 방신봉의 연속 블로킹 성공으로 8―8 동점을 만들고 이어 고비마다 전 선수들이 골고루 블로킹을 잡아내 25―22로 승리했다. 2세트에서는 26―26의 듀스 상황에서 후인정의 스파이크와 이선규의 블로킹으로 28―26으로 따내 이변을 일으키는 듯했다.
그러나 삼성화재는 호락호락 무너지지 않았다. 전열을 정비한 삼성화재는 여오현 석진욱의 호수비를 바탕으로 장병철이 어려운 공격을 성공시키고 김상우의 중앙 속공이 터지면서 25―16으로 가볍게 따냈다. 4세트도 25―18로 가져온 삼성화재는 5세트에서 13―9까지 달아나다가 13―12까지 쫓겼다. 하지만 석진욱의 대각선 스파이크와 장병철의 블로킹으로 위기를 극복, 15―12로 경기를 마무리하면서 대기록을 달성했다.
신치용 감독은 "대기록 작성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선수들이 초반에 흔들렸다. 이제는 플레이오프와 결승전에 대비하겠다"고 말했다. 현대는 점수에서는 졌지만 경기내용면에서는 날로 좋아지고 있어 삼성화재가 독주하는 배구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박진용기자 hub@hk.co.kr
■삼성화재 대기록 비결
삼성화재의 독주가 가능한 것은 당연히 초 호화멤버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월드스타 김세진을 비롯, 소속 선수 6명이 국가대표이다. 라이벌 현대캐피탈에 국가 대표선수가 1명뿐인 것과 대조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코트의 제갈공명'으로 불리는 신치용 감독의 뛰어난 용병술과 훈련, 선수들의 철저한 자기관리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삼성화재 선수들은 매일 아침 7시 용인시 수지 체육관에 모여 몸무게부터 잰다. 저녁 9시 이후 금식하라는 신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밤참이나 술을 먹었다가는 꼼짝없이 걸린다. 이 때문에 선수들은 몸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을 수 없다.
훈련도 매우 혹독하다. 육상 장거리 선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매일 1만m를 달린다. 정신력은 바로 체력에서 나온다는 게 신 감독의 지론이다. 삼성화재가 위기 때마다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 풀세트 접전 100% 승률을 자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붙박이는 없다. 실수를 하면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뺀다"는 신감독의 용병술은 노장들로 하여금 후배들과 경쟁을 통해 다시 뛰도록 만들고 있다. 김세진(30)과 신진식(29)이 대표적인 경우다. 부상으로 오랫동안 코트에 서지 못했던 이들은 이번 투어에서 장병철과 이형두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채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다. 후배들의 선전에 자극을 받았는지 이를 악물고 재활에 나선 김세진은 2차 투어부터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신진식도 5차 투어 LG화재전에서 경기흐름을 뒤집는 대활약을 펼쳐 건재를 과시했다. 이처럼 끊임없는 자극을 통해 선수들을 거듭나게 하는 노하우는 삼성화재 대기록 달성의 또 다른 배경이다.
/박진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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