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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43>에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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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43>에베르트

입력
2004.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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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2월28일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54세로 작고했다. 사민당 출신의 에베르트가 임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죽은 뒤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가 당선됐다. 힌덴부르크는 의회와 사민당의 영향력을 배제한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의 수립을 꾀함으로써, 1933년 히틀러의 집권으로 정점에 이를 독일 사회 우경화의 시동을 걸었다.에베르트는 정치 활동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사민당과 함께 했지만, 그 시기의 전형적인 사회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데올로그라기보다는 실무가였고, 사회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에 가까웠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사민당 우파를 이끌며 제국 정부와 군부의 전쟁 수행을 지지했다. 종전 직후에 에베르트는 사민당 당수 겸 임시정부 수반으로서 참모차장 빌헬름 그뢰너와 '그뢰너-에베르트 협약'이라는 것을 맺었는데, 공화국에 대한 군부의 지지를 얻어내는 대가로 혁명 운동의 가혹한 탄압에 동의한 이 협약 때문에 사회주의의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전쟁에 반대하던 사민당 좌파가 떨어져나가 만든 스파르타쿠스단(독일공산당)의 1919년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주체 가운데 한 사람이 에베르트였다.

당연히, 에베르트의 집권 기간 중에 사민당과 공산당의 관계는 악화를 거듭했다. 그러나 그가 후임자인 힌덴부르크나 히틀러와 달리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에베르트는 장남에게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는데, 아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1894∼1979)는 사민당원으로서 히틀러 집권기에 투옥되었다가 종전 뒤 통일사회당(옛 동독의 집권 공산당) 건설에 참여하고 1948년부터 1967년까지 동베를린 시장을 지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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