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처럼 발행, 박천홍 지음
어린시절, 시골 할머니 댁에 가기 위해 탔던 기차 안에서 계란과 음료수를 마시면서 창 밖을 바라보던 기억, 그리고 학창시절 무작정 홀로 좌석도 없이 부산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서 6시간여를 여행했던 기억은 지금도 소중한 나의 추억거리다. 유난히 기차여행을 좋아했고, 방학이면 항상 기차를 타고 어딘가 떠나가고 싶었던, 그리고 지리부도에 나오는 기차역을 외우면서 다음 번에는 어디를 갈까 고민했던 그 시절이 아름답게만 떠오른다.
그러나 기차, 넓은 의미에서 철도의 역사는 근대성과 자본주의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인류문명의 엄청난 산물이다. 요즈음은 삶의 편의수단으로, 교통수단의 핵심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건 기차와 철도의 등장은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노량진에서 제물포로 가는 첫 기차가 출발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독립신문 기자의 시승기를 보면, 그 움직임과 진동이 '우레'와 같았다고 하니, 신문물의 생경함과 호기심이 남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역사에서 기차와 철도는 식민지건설의 전초기지라는 미명아래 일본에 의해 건설된, 즉 '우리'의 자발적인 힘에 의해 만들어지지 못한 뼈아픈 기억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식량수탈과 광물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구실로 급조된 경부선, 호남선, 경원선 등 사실상 식민지형 철도의 대표적 부산물이 바로 한국철도 역사의 태동기를 장식한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에게 철도는 근대의 축복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의 서막이었다." 전통적 생활양식이 철도건설로 인해 하루 아침에 바뀌고 국가경영의 핵심 축이 기찻길이 뻗은 바대로 반영되었다. 기차 안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이 깨지며 외형적으로나마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충남권의 대표도시가 공주에서 대전으로 바뀐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책은 한국철도의 태동기인 구한말과 일제치하의 역사적 상황을 풍부한 사료와 문학작품을 동원하여 복원해낸 역작이다. 특히 역사를 전공하고 출판잡지 전문기자를 역임했던 저자의 이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역사책 하면 떠오르는 딱딱함이나 지루함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아울러 전문저술가로 나선 저자의 앞으로의 작품이 한껏 기대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4월 1일에는 한국철도 역사의 또 다른 신기원이 열린다. 암울했던 태동기의 역사를 벗어 던질 고속철도의 출범이 그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제 창 밖 풍경을 보면서 '느림'과 삶의 여유를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가 절대적으로 줄어든다는 점이다. 고속철도가 출범하기 전에 '느린' 기차를 타고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사치일까.
/이승우·길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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