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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살면서]"舊동독의 유산" 베트남인 담배 밀매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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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살면서]"舊동독의 유산" 베트남인 담배 밀매꾼

입력
2004.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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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 몇 보루의 밀수 담배를 감추고 있을 헐렁한 잠바 속 주머니가 눈에 띄게 불룩 튀어나와 있어서도 안되고, 거슬러 줄 잔돈이 잔뜩 든 주머니에서 지나치게 동전 소리가 나서도 안된다.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전철이나 기차역, 쇼핑센터나 슈퍼마켓 앞에 상주하면서도 그곳을 지나다니는 많은 보행자 중 하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 담배를 사러 온 고객에게 돈을 받고 담배를 건네주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도 아는 친구와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눈에 띄어야만 한다. 높은 세금으로 한 갑에 5,000∼6,000원을 호가하는 시중 담뱃값이 부담스러운 애연가들이 알아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가보다 싼 담배를 사라고 대놓고 외치거나 '밀수 담배 할인판매'라는 간판을 내걸지는 못하지만 구매자에게 담배 상인임을 알려주어야 하는 이들의 교묘하고도 복잡한 생존전략은 아이러니하게도 검은 머리에 작은 키, 주름 많은 황색 피부라는 인종적 특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들은 베트남인이다. 전후 서독이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터키와 한국에서 광원과 간호사, 노동자를 불러 들였다면, 사회주의 동독은 사회주의 형제국 베트남과 소련의 인력을 수입했다.

독일 통일과 함께 동독 정권이 붕괴하고 일자리를 잃게 된 베트남인 가운데 아시아 음식을 파는 노점상이나 꽃가게, 싸구려 의류 행상 등으로 성공(?)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대한 베트남 담배 밀매 조직의 일선 밀매꾼이 되었다. 베를린에선 가끔 베트남과 러시아, 폴란드 밀수 담배 마피아 조직 간 영역 다툼을 둘러싼 살인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약간의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시중보다 싸게 담배를 사려는 사람은 우선 기차나 지하철역, 슈퍼마켓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베트남인을 찾아야 한다. 검고 뻣뻣한 머리에 작은 키, 헐렁한 점퍼와 허름한 청바지, 챙을 구겨 삐딱하게 눌러 쓴 야구모자에 하루 종일 일정한 장소를 떠나지 않는 동양인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 사람한테 싼 담배를 살 수 있다.

친구처럼 다가가 담배를 달라고 하면 마술사처럼 재빠르고 민첩한 손놀림으로 몸 속 어디선가 담배를 끄집어내 건네주는 놀라운 기교를 감상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유럽인들은 베트남인과 다른 동양인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슈퍼마켓 앞 벤치에 앉아 아이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던 내게 담배를 사려고 한 몇몇 독일인처럼 말이다.

김 남 시 독일/훔볼트대 문화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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