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목화의 창단 20주년 기념공연 2탄 '자전거'(2월13일∼3월7일)가 무대에 오르는 아룽구지 극장. 공연 전까지 훈련은 언제나 지독하다. 같은 장면을 반복하기를 몇 차례, 그때마다 대사를 추가하거나 빼고, 조명의 밝기를 조절하면서 극단 대표이자 연출가 오태석(64·서울예술대학 극작과 교수)은 폭소와 탄식, 절망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책상을 내리치며 화를 내는가 하면, 벌떡 일어나 깔깔거렸다. "늙을 틈이 없겠다"는 말을 던지자 그는 바싹 짧게 깎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며 웃음으로 대꾸했다. "여기는 어린이 놀이터야."쉬면 무너진다
짧은 머리에 츄리닝 하의, 운동화 차림이다. "행인들이 나를 환경미화원으로 안다"며 그는 웃음을 터뜨린다. 오태석은 "급급해 하고 허덕댄 20년"이라며 지난 세월을 돌아보았다. "목화는 식구처럼 항시 함께 지내는 연극 동인이지요. 창작극으로 한다, 구어체로 한다는 연극정신으로 함께 하는 거죠. 하지만 매해 신작을 내야하니 힘들죠. 쉬면 무너지죠. 30명 넘는 식구가 놀면 흐트러지니까."
그는 "상황이 열악해지면서 실험극장, 연우무대 등이 하나 둘 없어졌는데 우리가 아직도 동인제를 유지한다는 것, 하고 싶은 실험을 한다는 것, 젊은 연극인에게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의미"라며 가장 컸던 어려움으로는 선뜻 "생계 때문에 잘 훈련된 고참 배우가 느닷없이 나갈 때"를 꼽았다. "그럼 학예회가 되는 거지. 고참배우가 있어야 후배도 배우고 관객과 만날 때 완성도 있는 걸 보여주는데. 암담하지."
한명구 박영규 김학철 황정민 등 목화를 거쳐간 숱한 배우의 연기력은 정평이 나 있다. 목화는 또 손병호 성지루 이원종 김수로 등 최근 영화판을 빛내는 조연을 두루 배출했다. "돈 벌러 (영화와 TV로) 나간 그 배우들이 나쁜 소리 안 듣고 대우를 받는다는 게 기쁨이고, 지명도 있는 배우가 많지 않은데도 관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죠."
자신의 체험이 배인 대표작
'자전거'는 60편이 넘는 오태석 연극 가운데 대표작. 한국전쟁으로 부친을 잃은 그의 체험이 배어 있다. 오태석은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거닐다가 만날 수 있는 귀신이야기"라고 했다. 동사무소 서기인 윤서기(이명호)가 42일간 결근하게 된 결근계를 제출하면서 자신의 결근 이유를 구서기(이도현)에게 설명하는 것이 극의 내용이다. 윤서기는 정신을 잃게 된 사연을 찾아 헤매면서 두 가지 기억을 떠올린다. 하나는 전쟁 때 자신만 살아남은 데 따른 고통으로 시달리는 당숙이며 또 하나는 문둥이 부모 집에 불을 지른 처녀다. 윤서기는 구서기의 도움을 받아 정신을 잃었던 때를 되짚으면서 한국전쟁과 동네 문둥이의 아픔이 바로 자신의 아픔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인민군들이 충남 서천군 등기소에 마을 유지 120명을 가두고 불을 지른' 체험은 오태석 연극의 근원적인 기억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그는 "예전 충청도 사투리 버전을 경남 거창 버전으로 바꿨다"며 "어느 동네나 그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각기 다른 사투리 버전을 통해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고유의 말을 되살리겠다는 게 이번 공연의 취지 가운데 하나다.
나는 아직도 아마추어
오태석은 아직도 자신이 아마추어라며 말한다. 그의 극단은 공연 중에도 오후 2시에 나와 화장실 청소부터 하고 공연을 준비한다. "손님들 오시라고, 그것도 돈 들고 오시라고 하면서 깨끗하게 안 할 수 없잖아요. 그런 게 싫어서 배우들이 '목화'로 안 오는 거지."
극단 목화의 연극은 항상 진행형이다. 칼로 깎은 연필을 들고 오태석은 매번 메모를 하면서 연극을 고쳐 나간다. 그리고 극이 끝나면 배우를 불러 모아 다음날 공연을 위해 자신이 느꼈던 개선점을 전한다. 결혼식을 마친 뒤에도 '조영남 쇼'를 연출하러 간 '나쁜 남편'이었다는 그는 "나 돈 좀 벌게 해달라"고 우스개를 던졌다. 부인 최난선(55)씨가 "140석을 100석으로 동강내시고서는 뭘"이라며 무대를 위해 객석을 비워낸 것에 대해 지청구를 했지만, 오태석은 "아직도 연극을 위해, 그리고 관객을 위해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그의 완벽 지향은 극단 창단 20년을 맞으면서도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 연극 "자전거" 어제와 오늘
오태석 극본의 '자전거'는 1983년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가 초연으로 그해 제7회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연출상(김우옥), 미술상(신선희)을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우옥과 신선희는 입체적인 시골길과 대형 회전무대를 만들어 "신선희의 장치는 이번 연극제에서 가장 독창적"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재의 걸작무대"라는 평을 받았지만, 늘 전위에 서 있던 오태석 연극답게 오해도 함께 받았다. 당시 윤서기에 김명한, 구서기에 '미달이 아빠'로 친숙한 박영규가 나왔다. 고설봉씨가 70세의 나이로 한의원 귀신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87년 공연은 오태석 자신이 연출을 맡아 윤서기 한 명으로 공연을 끌고 갔다. "배우 한명구 혼자 두각을 보였던 시절이라 구서기를 없애고 갔다. 그랬더니 작품의 강점인 무의식적 시공간 여행의 재미가 없었다"고 오태석은 회상한다. '자전거'에서 구서기는 셜록 홈즈를 돕는 왓슨 박사 같은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2004년 공연은 윤서기의 회상을 후반부에서 반복·정리해 보여주는 플래시백 방식을 도입했다. 효과음을 내거나 장소를 이동하며 연극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5명의 배우를 투입해 관객을 배려한 점이 돋보인다. 관객들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서서히 극의 진행을 나름의 논리대로 추적하게 되고, 플래시백 장면에서 자신의 추리를 점검할 기회를 얻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적지 않지만 오태석식으로 말하자면 '틈'과 '숨쉬기'할만한 여지가 많아 보는 이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극을 이해하게 한다. 포대자루로 만든 길을 활용해 무의식의 여행이란 이미지도 강화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으로 극을 열어 비극적 분위기를 알려주고, 장중하면서도 서정적인 러시아 민요 '나를 나무라지 마세요'로 피날레를 장식하며 짙은 여운을 남기는 2004년의 오태석 '자전거'가 얼마나 신나게 질주할지.
/이종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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