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봄이다. 한여름에나 볼 수 있는 장대비가 내린 지난 주말 서울의 기온은 섭씨 18도를 기록했다. 기상 관측 100년 만에 2월 기온으로는 가장 높았다. 그러다 보니 꽃들이 헷갈린다. 올해는 음력 2월 윤달이 들어있는 해여서 봄꽃의 개화가 늦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런데 날씨가 이렇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너도나도 아우성치며 꽃잎을 터뜨릴 판이다. 가장 먼저 피는 봄꽃은 붉은 동백이다. 아니 동백은 봄꽃이라기보다 겨울을 보내는 꽃이다. 남쪽으로부터 동백이 꽃망울을 열고 있다. 이제까지는 꽃송이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이제 봄비를 겪었으니 그 기세가 장할 것이다. 남해의 봄바람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향일암(전남 여수시)이 그 붉은 기운으로 익어가고 있다.향일암은 유명한 기도터이다. 경남 남해의 보리암, 인천 강화군 보문사, 강원 양양군 낙산사 등과 함께 4대 관음기도도량으로 꼽힌다. 여수시의 맨 끝부분인 돌산도 남쪽 임포마을에 있다. 세속적 소원을 비는 곳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아름다움 만으로도 빛나는 절이다. 새로운 한 세기를 맞았던 2000년 1월1일 아침 이 곳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참배객을 안내하기 위해 자원봉사에 나섰던 임포마을 사람들은 모두 목이 쉬었다.
이 절을 창건한 이는 원효대사이다. 신라 선덕여왕 8년(659년)에 지었다. 암자가 있는 곳은 거친 절벽이다. 기어서 오르기도 힘든 돌비탈에 원통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수행을 했다. 절은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고 증축, 보수되면서 현재의 이름과 모습으로 남아있다.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온다. 20세기 초까지 이 암자의 이름은 영구암이었고 임포마을은 '장수가 태어날 곳'이란 의미의 장생포였다고 한다. 이 나라를 강점한 일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암자의 이름을 '일본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의 향일암으로 바꾸고 마을의 이름에 '들깨 임(荏)자'를 넣어 '아주 작은 마을'로 전락시켰다고 한다.
그런 사연과 관계없이 향일암은 일본 대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암자로, 불자는 물론 일반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평일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오를 정도로 붐빈다. 예전엔 오르는 길이 무척 험했으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 절의 살림살이도 나아지는 법. 이제는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향일암 여행은 가벼운 산책으로 시작된다. 차를 가지고 임포마을에 들어갈 수 없다. 마을 입구에서 약 800m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야 한다. 무료 셔틀버스가 있긴 하지만 걷는 것이 더 운치가 있다. 길 양쪽은 상록수림. 눈에 띄는 상록수가 있다. 동백나무다. 특히 바다쪽으로 난 언덕에 많다. 덩치가 큰 것은 수령이 5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막 빨간 꽃들이 피고 있다.
임포마을의 절 입구부터는 가파른 언덕이다. 그러나 힘들지 않다. 돌산 갓김치를 파는 길 양쪽의 식당가에서 너도나도 시식을 권한다. 서너번 받아 먹으며 맛을 음미하다 보면 어느덧 매표소이다. 매표소부터 돌계단이 시작된다. 모두 291개이다. 역시 계단 주변에도 동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계단이 끝날 무렵 큰 바위 사이로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정도의 비좁은 터널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경내가 시작된다. 과거 이 터널은 일주문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리석 용주로 최근 만든 일주문은 이 곳의 운치와는 조금 동떨어진다.
길은 계속 바위 사이로 구불구불 돌아간다. 향일암 전체가 거대한 바위더미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건물을 연결하는 길은 당연히 바위 사이의 틈새로 나있다. 1,000년이 넘는 세월과 그 세월을 오르내렸던 사람들에게 마모된 돌계단은 거울처럼 반들거린다.
바위의 모습이 독특하다. 왜 향일암의 옛 이름이 '영구암'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절이 올라있는 바위 천체의 모습이 거북의 형상이다. 그리고 바위의 거죽이 거북의 등과 비슷한 무늬를 갖고 있다. 삼성각에서는 아예 떼로 거북을 만난다. 두터운 책 한 권 크기의 돌거북 200여 마리가 난간을 뒤덮고 있다.
동백나무는 범종각 옆과 관음전 뒤편에 많다. 특히 관음전 뒤편의 나무들이 붉은 꽃을 많이 달고 있다. 단청이 바랜 절집을 바라보며 꽃 그늘에 앉아 본다. 섬들이 촘촘하게 박힌 파란 바다가 붉은 기운 아래 펼쳐진다. 봄이 눈에서 가슴으로 들어온다.
/여수=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수도권에서 보면 여수는 먼 곳이다. 자동차로 최소한 5시간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현지에 도착하면 꼭 봐야할 곳이 넘쳐난다. 당연히 시간이 모자란다. 가장 좋은 방법은 향일암으로 향하는 동선을 따라 명소를 구경하는 것. 여수 뿐 아니라 순천의 명소도 대상이 된다. 큰 마음 먹고 나선 길, 여수와 순천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아오자.
돌산도 방죽포해수욕장
여수시에 속한 해수욕장은 모두 7개. 향일암으로 가는 길에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해수욕장은 방죽포해수욕장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돌산읍 죽포리이다. 향일암으로 가는 해변도로에서 쉽게 진입할 수 있다. 폭 70m, 길이 300m 정도로 아담하지만 개성이 넘치는 해변이다. 하얀 모래와 하늘로 뻗는 송림이 특징이다.
특히 송림은 수령이 2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직선으로 쭉 뻗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불구불하지도 않은 나무가 바닷바람을 맞아 약간 기울어져 자랐다. 숲 여기저기에 의자가 놓여져 있다. 앉아서 봄 파도의 정취에 젖기에 좋다. 문득 하늘을 보면 푸른 솔잎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인다. 봄바람이 솔잎을 스치는 소리도 정겹다.
돌산대교
돌산도는 국내에서 7번째로 큰 섬이다. 과거에는 배로 이동했다. 그러나 육지와 섬 사이의 조류가 워낙 강해 이동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고 당시 돌산도는 그냥 섬으로 남아있었다. 1984년 여수시 남산동과 돌산읍 우두리를 연결하는 돌산대교가 놓이면서 섬은 환골탈태했다.
돌산대교는 길이 450m, 폭 11.7m, 높이 62m의 사장교이다. 17번 국도가 이 다리를 지난다. 섬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시설이면서 여수가 자랑하는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다리를 건너 돌산도에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돌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돌산대교 뿐 아니라 여수시내, 여수항 그리고 주변의 섬들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여수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돌산대교는 밤에 찾아야 제격이다. 2000년 10월 다리를 비추는 조명시설을 갖췄다. 단순히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공연'을 펼친다. 모두 8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0여 가지의 기본 색상 연출이 가능하다. 어둠이 밀려오면 연인들도 돌산공원으로 밀려온다.
오동도
여수하면 오동도, 오동도하면 동백꽃이 떠오른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기점이자 종점이기도 하다. 여수 중심가에서 차로 10여분 걸리는 오동도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800m의 방파제를 15분 정도 걸으면 섬이다. 매표소와 오동도 사이에 동백열차가 운행되기도 한다.
3만8,000여 평의 섬에는 동백나무, 산죽의 일종인 시누대 등 200여 종의 상록수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다. 5,000여 평의 잔디광장 안에는 1998년 5월 개관한 관광식물원이, 주변에는 70여 종의 야생화가 자태를 뽐내는 화단과 기념식수동산 등이 있어 어린이들의 자연학습장으로 좋다. 섬 전체를 덮고 있는 3,000여 그루 동백나무는 이달 중순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3월로 접어들면서 절정을 이룬다.
섬 전체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탐방로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고, 종합상가 횟집에 가면 남해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을 맛볼 수 있다.
섬 안으로 들어가는 교통수단으로는 동백열차를 비롯해 유람선, 모터보트 등도 있다. 유람선과 모터보트는 오동도 입구 선착장에서 출발한다. 용굴, 병풍바위, 지붕바위 등 해안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돌산대교, 향일암을 다니는 유람선도 있다. 오동도 매표소 (061)690-7304.
순천 조계산 선암사
선암사(仙巖寺·전남 순천시 승주면 죽학리)는 전남 도립공원 조계산(884m)에 있는 대찰이다. 조계종 다음으로 국내에서 큰 불교 종단인 태고종의 본산이다. 백제 성왕 시절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머물렀던 비로암 자리에 신라말 도선국사가 큰 절을 일으켰다. 한때 60여 동에 달했던 대가람은 전란과 화재를 거듭 겪으며 20여 동으로 줄었지만 그 위엄까지 잃은 것은 아니다. 삼층석탑(보물 제395호)과 승선교(제400호) 등 많은 보물들을 중심으로 깊이와 아름다움이 건재하다.
산 반대편 기슭에는 조계종 승보(僧寶)사찰인 송광사가 있다. 등을 대고 자리한 송광사가 번화한 반면 선암사는 고적하고 은근한 멋을 내뿜는다. 절 다운 절이다. 선암사 계곡길은 아름답다. 사하촌(寺下村)에서 1.5㎞ 정도 걸으면 절에 닿는다. 경사가 거의 없는 이 길은 자연이 스스로 빚은 수목원이다. 나무는 저마다 다른 모습이다. 말채나무, 이팝나무, 서어나무, 대팻집나무, 금식나무…. 이름조차 낯선 나무가 늘어서 있다. 친절하게 나무마다 이름표와 소갯말을 걸어놓았다.
돌다리가 계곡을 가로지른다. 높은 곳에 버티고 있는 것이 조선 숙종 39년(1713년)에 만들어진 승선교(昇仙橋). 보물로서의 기품이 당당하다. 자연석을 기반으로 화강암을 무지개처럼 이어놓았다. 바로 위에 강선루(降仙樓)가 있다. 붉은 색 기둥이 돌다리와 잘 어울린다
선암사와 송광사가 자리한 조계산은 백두대간의 호남정맥을 호령하는 산이다. 영암 월출산, 광주 무등산과 더불어 호남의 3대 명산으로 꼽힌다. 비교적 완만한 산세에 등산로가 깔끔하게 조성돼 있어 연인이나 가족 단위의 산행에 적합하다. 선암사-정상-굴목재-마당재-송광사의 완주코스는 약 10㎞로 4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지 않는 능선코스는 8.2㎞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세 가지 길이 있다. 첫번째 길은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아름다운 길이다. 호남고속도로 전주IC에서 나와 시내를 우회해 17번 국도를 탄다. 남원-구례-순천을 지나면 여수에 닿는다. 17번 국도는 돌산도에서 끝난다. 계속 이 길만 이용하면 된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구경할 수 있다. 돌산도 내의 죽포리에서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체국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향일암으로 향한다.
두번째 길은 계속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광주를 지나 남해고속도로를 이어 타다가 서순천IC에서 나오는 방법. 17번 국도가 기다린다. 가장 단순한 길이다. 대전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이용해 진주까지 간 뒤 남해고속도로를 갈아타고 하동-광양을 거쳐 순천에 닿는 길도 있다. 가장 빠른 길이다. 여수역에서 101번, 여수시외버스터미널(061-652-6877)에서 111, 111-1번 버스를 이용하면 임포마을에 닿는다. 약 50분이 걸린다. 여수시청 관광홍보과 690-2225.
여수 시내에는 숙박시설이 많다. 여수비치호텔(061-664-9626) 노블레스관광호텔(691-1996) 벨라지오관광호텔(686-7977) 엑스포관광호텔(653-7777) 파크관광호텔(663-2334) 등이 규모가 있는 숙박시설이다. 향일암 주변에는 모텔이 많다. 한솔모텔(644-5089) 일출모텔(644-4729) 황토방모텔(644-9231) 등이 있다. 임포마을은 '식당촌'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민박을 친다. 아침 일출을 향일암에서 보기를 원한다면 임포마을에서 숙박을 하는 것이 편하다.
돌산 갓김치가 여수의 특산품이다. 돌산도에서 자라는 갓은 다른 곳의 것과 달리 가시가 없고 섬유질과 매운맛이 적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향일암 인근에 직접 갓김치를 버무려 파는 집이 많다. 갓김치를 사는 관광객을 향일암 주차장까지 무료로 차에 태워주기도 한다. 여수농협 돌산 갓김치 공장(061-644-2185)이나 돌산 갓 영농조함(644-0636) 등에서는 택배로 갓김치를 판다.
남도의 먹거리가 모두 상에 올라오는 한정식도 유혹적이다. 한려관(642-5600) 오죽헌(685-1700) 한려파크(644-4500) 등이 여수시가 추천하는 한정식집이다.
● 동백나무
동백(冬栢)나무는 차(茶)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수이다. 이른 봄 가지 끝에 붉은 색 꽃이 한 송이씩 핀다. 개화한 꽃은 귀족적이고 아름답지만 꽃이 지는 모습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꽃잎이 마르거나 퇴색하지 않고 송이째 툭 떨어진다.
지름 3∼4㎝의 열매를 맺고 열매 속에는 짙은 갈색의 씨앗이 들어있다. 이 씨앗을 짜면 기름이 나오는 데 올레산이 90% 함유된 동백기름은 과거 부녀자의 머리기름으로 쓰였다. 지금은 정밀기계의 윤활유 등 공업용으로만 사용된다. 충남 이남의 해안가에 주로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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