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일대를 촛불시위의 물결로 뒤덮었던 격정의 순간들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과연 우리는 1년 전의 감성적 열기를 식히고 좀더 차가운 이성으로 한미관계를 바라보게 되었는가. 이번 한국일보 여론조사 결과는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이번 여론조사에서는 한미관계에 대한 국민들의 '전략적 인식'이 드러난 것으로 평가된다. 국민들 상당수(61.4%)가 주한미군을 한국 안보에 필요한 요소라고 인식하고 있는 점, 그리고 이라크 추가파병이 우리의 국익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에 과반수가(59.8%) 동의한 점이 그렇다. 이는 노무현 정부 출범이후 지난 1년 동안 북핵, 주한미군 재배치, 이라크 파병 등에 관해 국론분열 직전까지 가는 논쟁을 거치면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학습과정'을 거친 결과라고 생각된다.
'제2차 북핵위기'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2003년 초 미국은 주한미군 재배치 의사를 전해왔고, 이로 인해 국민들은 주한미군이 과거 반세기 동안 행해왔던 역할에 대해 냉정히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2003년 3월 단행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지만, 명분을 둘러싼 범세계적 논란 속에 미국측으로부터 날아온 한국군 파병 요청은 우리 사회에 '자주 대 동맹'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을 통해 우리 국민은 한미동맹의 득실을 다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러한 학습과정의 결과, 대북 햇볕정책을 지속·강화하기(28.4%)보다는 햇볕정책과 강경정책을 병행해야 한다는 여론(57.1%)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게 됐다. 또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에 대한 지지여론(44.7%)이 반대여론(48.6%)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이르게 됐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궁극적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여론이 과반수(54.9%)를 차지하게 된 것도 북핵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안이함의 표출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한미동맹이 확고하고 주변국들이 북핵에 반대하는 한 결국 북한이 핵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전략적 사고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여론조사는 한미관계를 낙관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들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미국(46.3%)을 북한(25.1%)보다도 통일에 장애가 되는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대해 국민 절대다수(87.5%)가 개정을 원하고 있는 점 등은 아직도 상당수 우리 국민들이 미국을 전략적 차원에서 인식하기 보다는 '이미지'에 바탕을 둔 감성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동맹국으로서의 미국을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9·11이후 노골적으로 초강대국의 힘을 드러내고 있는 미국이 우리 국민들에게 '부담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가 던지는 한미관계의 과제는 무엇인가. 국민이 중장기 전략적 차원에서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양국정부가 한미동맹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점이다. 상호신뢰에 바탕을 둔 한미동맹이 지속된다는 것은 미국이 계속 동북아에 지리전략적 이해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동북아에 패권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특히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중·일간의 패권경쟁을 억지함으로써 한국이 피해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한미동맹은 통일한국이 제3국의 불필요한 개입을 우려하지 않는 가운데 통일과정에 매진할 수 있도록 안전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한국과 미국 정상은 빠른 시일내에 가칭 '한미 신 안보공동선언'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북한위협 소멸이후의 한미동맹의 비전과 구체적 실천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 선언은 한미동맹을 우리의 국가이익에 맞게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국민의 인식을 제고해 내부 갈등을 해소할 길을 열 것이다.
김 성 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