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82cm. 분명 쇠로 만들었지만 손에 잡히는 느낌은 가뿐하다. 칼집에 넣고 보면 날렵한 모습이 장신구를 연상시킬 정도이다. 칼집은 까만 옻칠의 몸매에 앞쪽에는 x자로 꼬인 은사가 길게 들어갔다. 칼자루는 금사와 은사를 꼬아 감았다. 칼자루 끝에는 금으로 둥근 고리를 달고 그 안에 용머리를 넣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재현한 이 칼은 보고 돌아서면 눈앞에 삼삼일 정도로 그 모습이 매혹적이다. 이 칼을 만든 이가 홍석현(50·전통도검제작소 대표)씨이다. 그는 지난해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사인검(四寅劍)을 그대로 재현,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전통 칼의 재현에 관한한 우리나라 최고의 명장이다.사인검은 호랑이해(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 등 인(寅)자가 네번 겹쳐질 때 쇳물을 부어 만든다는 보검. 호랑이는 십이지 가운데 양기가 일어나는 시기를 상징하기 때문에 인자가 네번 겹쳐지는 4인에 만들어진 사인검은 음(陰)하고 삿된 기운을 베어 국가의 위기를 물리친다는 벽사(壁邪)의 의지를 담고 있다. 사인검은 보통 칼날의 한 면에는 국가의 어려움을 물리치려는 주문을 전서체 한자로, 다른 한 면에는 28성숙(별자리)도를 그려넣어서 금속상감기법에 정통해야 만들 수 있다.
칼날은 무쇠를 담금질하여 만들고 칼자루에는 금속조각이 들어가며 칼집은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하거나 어피(魚皮)를 붙이니 전통공예의 다양한 기법을 모두 다 전수하지 않고는 작업에 나서기가 힘든 것이 전통 칼이다.
홍씨는 1989년 곽재우 장군 검을 재현한 것을 시작으로 2001년 백제 무령왕릉 환두대도, 2002년 가야 단봉 환두대도와 김유신의 용봉 환두대도를 재현했다. 지난해 경복궁 근정전을 복원한 것을 기념하여 문화부가 특별전시한 조선 왕실의 사인검 운검 별운검 등 8종의 전통 검을 재현한 사람도 그다. 그는 "세계적으로는 일본의 검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의 전통 검의 역사가 더 오래되고 그 모습도 매우 아름답다"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전통 칼을 만드는 장인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안타까워 재현에 나섰다"고 말한다.
홍씨가 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불과' 19년이다. 그러나 전통 도검의 바탕이 되는 전통공예에 입문한 것은 36년이나 된다.
충북 청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1968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청주에 있는 농방에 취직했다. 농 짜는 기술을 익히는 손놀림이 재발라 보였던지 이모부의 추천으로 69년에는 서울에 있는 나전칠기 공예사에 취직이 됐다. 자개로 만든 담뱃갑이나 화병, 장식장 같은 것이 큰 인기를 끌 때였다. 당시 농방이나 나전칠기사나 기술자가 아니면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최고의 대우였는데 그만은 경력이 인정되어 월급을 990원 받았다. "어머니한테 갖다드렸더니 돈은 쓰시고 봉투는 고스란히 모아놓으셨더군요."
하지만 이 곳은 소품만을 만들었다. 그는 진짜 나전칠기 가구를 만드는 곳을 찾아 76년에는 전농동의 자개거리로 옮겨갔다. 비로소 나전칠기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는데 그는 "꽃을 오리면 위와 아래가 똑같았고 (육각형 자개를 이어붙이는) 거북이를 만들면 위에서 물을 부어도 내 것은 새지 않았다"고 스스로의 솜씨를 자랑했다. 이 때문에 실력 중심으로 앉은 자리가 정해지는 나전칠기 농방에서 3년만에 제일 끝자리에서 두번째 자리로 치고 올라갔다. 그만큼 질시도 심해졌다. 퇴근길이면 으슥한 골목에 숨어있다가 그를 때리고 가는 선배들이 많았다.
"이유없이 맞는 게 너무 싫어서" 79년 공예사를 차리고 독립했다. 기념패나 명패를 새기는 게 주업종이었다. 기념패나 명패를 다루다 보니 금속 조각도 하게 됐다. "자개나 금속 조각이나 상감기법을 쓴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85년쯤인데 공예하던 선배가 와서 '칼에도 조각해보라'고 권했다. 그가 해보였더니 "도검 제작사를 차리려고 하니 함께 하자"고 했다. 그래서 이 해에 도검제작자로 변신했다.
그 때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공주박물관에서 본 무령왕릉 환두대도를 재현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령왕릉의 환두대도는 정교한 장식이 당시의 그에게는 너무도 높은 벽으로 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도검 제작사들의 주 수입원은 검도용 칼을 만드는 것이다. 제작기법은 무쇠를 사다가 모양을 잡아가며 두드려 편 뒤 장식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검 제작사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장식을 내는 법 정도였다. 나전칠기와 금속조각을 잘하는 그의 솜씨가 돋보일 수 있었다. 한 때는 대통령이 장군에게 하사하는 삼정도를 만들기도 했다.
다행히 선배는 "남는 시간은 네 맘대로 작품 활동을 하라"고 했다. 그는 전통 검을 찾아서 박물관을 쏘다녔다. 우리나라 전통 칼의 모습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울만한데 어디에도 그 칼을 만드는 법에 없었다.
89년 그가 가장 먼저 복원에 나선 것은 곽재우 장군 칼. 전통 도검치고는 기법이 고난이도가 아니어서였다. 이어서 이순신 장검을 복원했다. 곽재우 장군 칼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기법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전통 도검을 복원하겠다는 뜻은 가상했지만 아무런 연고도 경력도 없는 그를 전문가가 나서서 도와줄 리 만무했다. 그는 충북 목천의 독립기념관이나 충남 아산의 현충사를 찾아 전시장 유리창에 코를 박고 칼 모습을 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충무공 칼을 만들 때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진 직후였는데도 현충사를 매일 찾아 칼 모습을 베끼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고 한다.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검도 칼을 팔아 돈이 생기면 전통 칼을 만드는 일이 거듭됐다.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지만 힘들어 작파하려고 한 적도 많다. 92년에는 택시운전사 자격증까지 따고 안되면 막노동이라도 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동료들이 "작품 활동만 하게 해주겠다"고 하여 다시 칼을 잡았다.
작품 활동이란 그가 잘하는 상감과 조각에만 전념케 해주겠다는 것. 인사동에서 금속 상감만 전문으로 하다가 97년에 다시 칼 만드는 일로 돌아섰다. "제 이름에 쇠 금이 두개가 있어요. (한문으로 錫鉉) 이름자가 쇠를 만들어 남한테 다 퍼주는 운명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는 이 해에 전통도검제작소를 설립하고 늘 꿈에 그리던 무령왕릉 환두대도를 만드는 데 나섰다. 저렇게 섬세한 금속조각은 어떻게 했을까, 칼자루와 칼은 어떻게 붙였을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지만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칼을 가까이서 볼 수도 없었다. 역시 박물관 유리창에 코를 박고 베끼는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고고학자들의 발굴 보고서에 나온 칼 그림을 참조해서 칼을 만들었다.
만드는데 1년 2개월이 걸린 이 작품은 2001년 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을 탔다. 이어 이듬해에 만든 가야 단봉 환두대도로 역시 같은 전시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그는 비록 사인검이 지난해 대통령상을 받았지만 지금도 무령왕릉 환두대도가 가장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과제가 많다. 우선 전통 기법에 따라 만든다고는 하지만 쇠 자체가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 점. 가야 단봉 환두대도를 만들기 위해 직접 고로를 만들어 철광석을 녹여보았지만 전통 쇠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전통 검을 재현하기 위해 그는 현재 자동차 스프링을 매질해 쓰고 있다.
사실 조선시대 도검은 환도장(環刀匠) 마조장(磨造匠) 주성장(鑄成匠) 소목장(小木匠) 노야장(爐冶匠) 동장(銅匠)이 함께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쇠까지 진짜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전통 철을 제외한 다른 분야를 모두 혼자서 해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그는 "고로 만들 비용만 있다면 전통 철을 만드는 것도 해 볼 텐데 그게 아쉽다"고 의욕을 보였다.
서화숙 편집위원/hssuh@hk.co.kr
그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국보급 칼을 재현했지만 지난해 근정전 왕실 도검류와 고려대 박물관 소장 사인검만 실측을 할 수 있었다. 왕실 도검류는 육사 박물관에 진본이 있는데 그가 궁도를 해서 육사를 드나든 인연이 한 몫을 했고 고려대 사인검은 재료비를 받고 작품을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실측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또 새로운 전통 검을 재현할 때 실측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
그는 "한국 전통 검을 세계에 알리려면 더 많이 재현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자격이 인정된 장인에게는 유리창 너머로가 아니라 직접 보고 눈대중할 기회라도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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