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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22>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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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22> 단성사

입력
200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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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삼천리 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 곳을 떠나는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변사의 애를 끊는 해설과 더불어 주인공 영진이 일본경관에 끌려가고 주제가 아리랑이 흐른다.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1902∼37)가 각본을 쓰고 주연과 감독을 맡은 영화 '아리랑'의 마지막 장면이다. 일제강점기는 미치지 않으면 올바로 살 수 없었던 암흑기였다. 한계적 상황에 봉착한 우리 민족에게 혼을 불어넣은 민족영화의 효시 아리랑이 상영된 극장은 종로의 단성사(團成社)였다. 개봉일인 27년 10월1일, 공교롭게도 조선총독부 청사의 낙성식이 열렸다.

흔히 단성사를 한국영화의 역사라고 말한다. 광복 전에는 한국영화의 발아와 성장을 이끌고 버팀목이 된 요람이 되었다. 광복 후에도 '벤허' '애수' '역마차' '쿼바디스' '셰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대장 부리바' '나바론' '대부' 등에서부터 '겨울여자' '장군의 아들' '서편제'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부침을 지켜보았다.

단성사는 지금 새로 태어나기 위한 산고가 한창이다. 다섯 개의 영화관을 갖춘 멀티플렉스의 문화공간으로 내년에 다시 문을 연다. 단성사는 신축공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동안 첨단극장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헐린다는 소식에 마음 아파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 회장은 이남규(李南珪·93)옹, 사장은 아들 성호(性湖·49)씨. 주한미군에게 용역을 제공하는 남한기업공사를 설립, 부를 축적한 이옹이 단성사를 인수한 해는 62년이었다. 단성사는 신축건물 9층을 한국영화의 미래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그런 계획의 하나가 '영화역사연구소'(가칭) 설립이다. 2007년 설립 100주년을 앞둔 단성사는 100년사 정리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66년 입사한 조상림(曺相林·70)상무가 그 작업을 이끌고 있다. 연세대를 나온 그는 단성사에서 상영된 영화포스터와 스틸 등 시각자료 300여점을 비롯,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했다.

상설영화관으로서 단성사의 토대는 당대의 흥행사 박승필(朴承弼·1875∼1932)이 놓았다. 박승필은 개화기 국악전문공연극장 광무대(光武臺)를 소유할 정도의 재산가이기도 했는데 1918년 2월 단성사를 인수한 뒤 본관을 신축, 상설영화관으로 사용했다. 그 무렵 서울 장안에 촬영기는 단 3대뿐이었다. 개인으로는 박승필과 일본 여성 요도 도라조(淀虎藏)가 갖고 있었고 나머지 한 대는 조선총독부 소유였다. 모자점을 운영하던 요도 도라조는 훗날 나운규에게 아리랑의 제작비를 대주고 촬영기까지 빌려주었다.

박승필은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로 단성사의 전성시대를 연다. 이 작품은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연쇄극(kinodrama)으로 연극의 배경화면만 찍어 무대 위 스크린에 쏘는 것이었지만 단번에 장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단성사의 성장에는 민족감정도 큰 힘이 됐다. 20년대 서울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서울 토박이들이 주로 살던 종로 일대의 북촌, 일본인이 새롭게 거주지를 형성하던 충무로 부근(진고개)의 남촌으로 나뉘었다. 극장도 한국인 중심의 북촌극장과 일본인이 주로 다니던 남촌극장으로 구별됐다.

단성사는 우미관 조선극장과 함께 북촌의 얼굴이었고 남촌극장의 중심은 99년 헐린 황금좌(국도극장의 전신)였다.

일본소설 금색야차(金色夜叉)를 영화로 제작한 '수일과 순애'를 올린 극장도 단성사였다. 처음에는 '장한몽'의 제목을 달았다. 영화를 촬영하던 중 갑자기 주인공이 증발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다급해진 감독은 제작진 가운데 가장 잘 생긴 남자를 대타로 내세웠다.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었다.

단성사는 1907년 동대문시장의 거상이었던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이 공동으로 발의해 이 해 11월 목조 2층 건물로 개관했다. 단성사의 상호에는 '힘을 모아 뜻을 이루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단성사 최초의 스타는 노기(老妓)였다. 노기라고 해야 갓 스무 살을 넘긴 나이였다. 오갈 데 없던 이들은 무부기(無夫妓)조합을 결성했다. 남편이 없다 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단성사는 출범 초기 무부기조합의 기녀들을 초청해 공연을 가졌다. 춤과 노래 등 모든 면에서 원숙한 기량을 지녔으니 인기를 끌만했다. 인기투표까지 실시돼 김봉선이 1위를 차지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극에 달하던 39년 단성사는 대륙극장으로 이름이 바뀌며 세번째로 일본인 손에 넘어가지만 광복 이듬해 이름을 되찾는다.

"수 많은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들은 생각했었다. 언젠가는 이 누추한 현실을 벗어나, 저런 아름다운 곳으로, 생활의 때가 묻지 않은 마음에 드는 곳 어디론 가 멀리 가보고 싶다." 작가 인정효씨는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이렇게 썼다.

그렇다. 극장은 또 다른 신전이다. 그 공간에 머무르고 있는 순간 만큼은 저마다 합당한 정서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단성사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며 기다리고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해방후에만 1,028편 관객 5,099만명 찾아

단성사는 기록의 산실이다.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 관객동원의 신기록은 대부분 여기서 이뤄졌다. '역도산'(65년·32만) '겨울여자'(77년·58만) '장군의 아들'(90년·67만) '서편제'(93년·84만)가 기록의 주역들이다. 불과 두 달 만에 32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인 역도산은 궁여지책으로 걸어놓은 작품이었다. 상영 예정 작품이 오지 않는 바람에 단성사는 이를 대체할 영화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역도산과 일본레슬러의 대결을 찍어놓은 필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필름을 구입, 해설을 삽입해 상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과는 대박이었다. 한국영화는 서편제 이후 불과 10년 세월에 관객 1,000만명 시대를 열고 있다. 단성사는 그러한 도정에서 영화산업의 벗이자 동반자의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성사에 따르면 53년 1월1일부터 신축공사로 문을 닫기 전인 2001년 8월31일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단성사를 찾은 관객은 5,099만 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같은 기간 상영된 영화는 총 1,028편에 달한다.

단성사는 한국영화사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달린 기록을 여럿 남겼다. 한국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19년)', 민족영화의 효시 '아리랑(26년)', 한국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35년)'이 모두 단성사를 통해 세상에 선을 보였다. 특히 '의리적 구토'에 삽입된 약 1,000피트의 필름은 한국배우들이 처음 출연한 영화라는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영화계는 이 작품의 개봉일인 10월27일을 한국영화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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