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 곱게 글이나 쓸 걸 괜한 짓 했나 봐요. 별명이 '동양자수'일 정도로 힘들게 작품을 쓰기 때문에 다른 데 머리를 쓸 여유가 없는데…." 23일 한국방송작가협회 새 이사장에 취임한 박정란(63)씨는 걱정부터 쏟아놓았다. 여성으로는 김수현씨에 이어 두번째로 이사장이 된데다, 경선과정에서 원고료 협상부진 등 협회에 대한 회원들의 누적된 불만이 터져 나온 터라 어깨가 한층 무거운 듯했다."드라마 작가와 달리, 교양이나 라디오 작가들은 온갖 잡일까지 떠맡고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이들에게 힘이 되어야죠. 너무 순해서 협회를 잘 이끌 수 있을까 걱정하는 소리도 들리지만,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차근차근 풀어나가려고 해요."
그녀가 덥석 '큰 일'을 떠맡는 용기를 낸 데는 둘도 없는 친구, 김수현씨의 도움이 컸다. 특히 김씨는 회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지지를 호소했다.
김씨는 "성격이 정반대여서 서로 진저리를 치면서도 데뷔 이래 35년간 친구관계를 이어온 것은 100% 박정란씨의 너그러움 덕분이다. 또 그이는 강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박 이사장은 그런 김씨에 대해 "날카롭고 호불호가 너무 분명하지만 사람을 화끈하게 감동시키는 매력이 있다. 배우들도 '깊은 정은 김 선생님이 더 많다'고 한다"며 고마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작가로서 박정란씨는 연말쯤 KBS에서 새 연속극을 선보일 예정이다. '내일 잊으리' '울밑에 선 봉선화' '곰탕' '소문난 여자' 등 이 땅 여성들의 신산한 삶을 주로 다뤄온 그녀는 "이번에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자 얘기"라고 귀뜀한다.
"작년 '노란 손수건'으로 여성부가 주는 '남녀평등 방송상' 대상을 탔지만, 처음부터 호주제를 다루려고 작정한 건 아니었어요. 이번에도 여성이 처한 현실을 그리다 보면 또 다른 제도적인 문제가 부각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평소 트렌디 드라마까지 열심히 챙겨보는 그녀는 "재기는 넘치지만 기본이 안된 작품이 너무 많다"고 걱정한다. 특히 절친한 이장수 PD가 만든 '천국의 계단'에 대해서도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이 PD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천국의 계단'이 나와 함께 만든 '곰탕'보다 더 좋은 작품이라고 말한 걸 보고 경악했어요. 말이 안 돼도 재미있으면, 시청률 높으면 그만이라니, 드라마가 무슨 서커스 놀음입니까."
그녀는 "슬프면 슬픈대로, 유쾌하면 유쾌한대로 보는 이들에게 맑은 산소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어야 좋은 드라마"라고 덧붙였다. 연속극 한번 하면 1주일에 무려 700장의 원고를 써내야 한다. 한 달에 소설 두 편씩을 쓰는 셈이다. 웬만큼 건강하지 않고서는 버텨내가 힘든 작업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난해 KBS 작가상을 받는 자리에서 "여든까지 쓰겠다"고 말했다.
"무슨 욕심이 그리 많으냐고요? 후배들이 저나 김수현씨 보고 '선생님들이 펜 놓으시는 날이 바로 작가의 정년입니다'라고 해요. 그런 후배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기 위해서라도 꿋꿋이 써야지요."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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