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욕망'(사진)이 가야 할 길은 둘 중 하나다. 욕망이 충족되는 과정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욕망이 끝내 채워지지 않는 결말을 보여줄 것인가. 이미 정답은 나와 있는 셈이다. 라캉이라는 심리학자가 말했던 것처럼(게다가 감독은 심리학과 출신이다!) 욕망은 항상 결핍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다. 욕망의 미끄러짐? 하지만 우린, 돌이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산을 오르는 시지푸스처럼, 매일같이 욕망이 채워지길 바라며 살아간다.'욕망'이 보여주는 세계는간단하다. 부부가 있다. 아이는 없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상대는 젊은 남자. 아내는 남편의 애인과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영화는 동성애나 양성애 같은 '뜨거운' 느낌을 걷어내고, 건조한 현실 속에서 꿈틀대는 욕망과 그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욕망의 노예인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앙상한 행동들은 자세히 보면, 모두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몸부림이다.
한국영화에서 이처럼 욕망에 휘둘렸던 자들의 연대기를 구성해본다면 벌써 반세기 전 영화가 된 1956년 영화 '자유부인'이 떠오른다. 이 영화의 히로인 오선영은 점잖은 교수 사모님. 친구 따라서 선남선녀 손 맞잡고 빙빙 돌아가는 댄스홀에 한 번 다녀온 후부터 인생이 바뀐다. 게다가 하숙집 청년의 유혹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잠깐! 여기서 '자유부인'은 경고등을 켠다. 그녀는 '불륜'이라는 덫에 걸려 좌초하고, 결국 남편 앞에서 용서를 빌며(근데 남편도 바람 피웠다), '오선영의 위험한 욕망'은 그렇게 진압된다.
에로 영화라고 해서 욕망이 시원스럽게 해결되진 않는 것 같다. '애마부인'(1982년)의 애마는 교도소에 간 남편을 기다리며 긴긴 밤 허벅지 쑤셔가며 참는다. 이때 레즈비언 느낌 물씬 풍기는 친구 에리카가 등장해 한 마디 툭 던진다. "애마야, 제발 그 봉건적인 사상 좀 버려." 하지만 어쩌랴. 애마의 욕망이 해결되면 속편이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을. '애마부인'은그렇게 13편까지 버텨왔다. 변강쇠와 옹녀라고 해서 뾰족한 수는 없었다. 상대방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만 성욕이 풀리는 '색정남녀'의 결말? 욕망의 해소가 아니라 끝없는 방랑과 비참한 죽음이었다.
욕망의 고통스러움은 1990년대 이후 장선우의 화두이기도 했는데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년)나 '거짓말'(2000년)은 성적 쾌락의 끝에서 맛보는 허무주의를 보여준다. 반면 임상수는 조금 입장이 다른 것 같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년)에서 솔직하게 섹스 이야기를 털어놔 보자고 제안했던 그는, '바람난가족'(2003년)에 이르면 '우리 모두 바람피워, 명랑사회 이룩하자'고 말한다. 여기서 꿈같은 영화가 한 편 있다면 '정사'(1998년)다. 여동생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남편도 아이도 내팽개치고 누군가를 만나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영화 속이든 현실이든 욕망은 해결될 수 없고 아쉬움과 욕구불만이 남을 뿐이다. 그래서 우린 영화관의 판타지를 원하고 잠깐이나마 도피하며 다시 결핍의 현실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영화 '욕망'은 너무 잔인한 것 아닐까? 스크린 속 그들은, 관객들보다도 훨씬 더 비참한 결핍 증세를 겪고 있으니 말이다.
/김형석·월간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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