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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제조업 사내 하청 노동자 차별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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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제조업 사내 하청 노동자 차별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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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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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인 박일수씨가 '하청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한 지 사흘 뒤인 18일 밤 경기 화성시 K자동차 공장. 잔업을 마친 주간근무 노동자들이 피곤한 몸을 통근버스에 의지해 속속 안식처로 돌아가고 있었다. 작업복과 사복이 뒤섞여 있는 지라 구별이 되지 않지만 이 회사는 정규 생산직 1만여명에 하청 노동자 2,500여명이 쉴 새 없이 한국경제의 동력인 자동차를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 하루 머슴 잘 살았다." 8시간 정규근무와 3시간의 잔업을 마치고 퇴근한 사내 하청 노동자 L(36)씨는 '일이 끝나면 무슨 말들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팔 다리가 시린 단순노동과 뻔한 임금에 자조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답했다.

분신한 박씨가 유서에서 토해놓은 하청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곳이라 해서 별반 다를 게 없다. 도장작업 같은 공장 내 3D 공정은 도맡다시피 하고 복지 혜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정규직에 비하면 쥐꼬리만한 월급만 받는다. 하청 노동자가 몰려있는 작업장은 창고나 다름없는데다 냉난방시설이 없거나 낙후돼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엄청 추운 등 정규직 작업장과의 차이가 확연하다는 것이다.

K자동차 노조가 지난해 임단협에서 사측에 요구해 하청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이나 상여금을 다소 올리는 배려를 했지만 이들의 기대수준에는 턱없이 못미친다. L씨가 정규근로와 특근 3번, 잔업 60시간을 해 한달 동안 받는 봉급은 기본급 88만원을 포함해 월 120여만원. 정규직 근로자 임금의 60%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L씨는 "작업의 성격이 조립라인에서 단순노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규직과 기술의 질에서 차이가 나지 않는다"며 "노조 홍보물이나 정규직사원을 통해 엄청난 임금격차를 알게 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푸념했다.

"지난달 사다리작업 도중 허리가 삐끗한 동료는 작업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용역업체소장으로부터 나가라는 압력을 받다 결국 사표를 썼어요. 버텨보라고 말했지만 '나가라는 데 어쩌겠냐'면서 결국 그만뒀어요." L씨는 감정이 복받치는 듯 잠시 말을 끊은 뒤 "감독자는 근무시간에 병원조차 마음대로 못 가게 하니 우리는 인간도 아닙니까"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또 다른 하청노동자인 K(37)씨도 "선 상태로 오래 작업을 한 동료가 무릎인대 통증을 호소하다 꾀병을 부린다는 핀잔을 들었다"며 "아프다고 내색도 할 수 없으니 하청 노동자는 '기계부품'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다른 하청 노동자들은 정규직과의 갈등이나 노·노문제로 비춰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나이 어린 정규직이 하대를 하기도 한다"고 씁쓸해 했다.

임금 근무여건 사내복지 등에 대한 차별과 열악한 근무조건은 자동차 중공업 조선 중소기업체 등 20만∼30만명으로 추정되는 하청 노동자가 일하는 제조업 현장 전반에서 발견된다.

울산에 있는 H 자동차 회사의 하청업체 K사에 소속된 하청 노동자 10여명은 3일부터 연월차 휴가사용, 인격모독중지 등 요구조건을 내걸고 작업거부를 하고 있다. 이 라인은 대체 하청인력으로 곧바로 메워졌다. 이들의 요구 가운데 눈에 띠는 것은 근무시간 중 화장실 이용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이다.

의장라인에 있는 이들 하청 노동자들은 화장실에 못 갈 정도로 공정이 빡빡한 만큼 여유인원을 두든지 조장이나 반장이 대신 자리를 채워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규직은 여유인원이 대신 작업을 하거나 한 사람이 일정시간 두 사람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공정상 여유가 있어 근무시간 중 화장실 출입이 자유로운 반면 하청 노동자는 열악한 작업여건 때문에 생리현상조차 제약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 하청 노동자는 "휴식시간에 별 탈이 없다가 근무시간에 생리현상이 급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이를 호소하면 조·반장은 라인에다 볼일을 보라는 식으로 무시해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진 이 공장 역시 1만여명의 하청 노동자들이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는다. 탈의실 하나만 보더라도 TV나 온돌방이 마련돼 휴게실을 겸한 정규직과 달리 하청 노동자들은 30∼40명이 옷 갈아 입기도 빡빡한 공간이다. 제때 지급되지 않아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정규직에게 얻어 입곤 했던 작업복이나 안전화를 제대로 받기 시작한 것도 지난해 일이다. 이 회사의 아산공장에서는 하청 노동자가 지난해 3월 월차를 사용하려다 하청업체 관리자로부터 구타와 칼부림을 당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씨의 유서에는 기댈 데 없는 '이등 노동자'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이고 하청 비정규직에게 생색만 내는 법이다. 현대노조는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조이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 하청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어쩌다 보니 직영 노동자, 하청 노동자로 살 뿐인데 직영 노동자라 해서 하청 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라고 썼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 뿐만 아니라 군대식 노동통제완화나 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 철폐, 인간적 대우 등을 요구했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처지와 너무나 흡사하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하청 노동자문제 왜 생기나

대기업 제조업체에서 하청 노동자 문제가 왜 불거지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형식적 고용관계와 실질적 고용간의 괴리가 원인이다. 이들 하청 노동자들은 용역업체와 고용계약을 맺고 있으나 사실상 기업의 작업통제를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작업 종류와 업무량에서 정규직과 비슷한데도 이들은 용역업체와의 취업규칙을 적용받아 근로여건이 크게 악화된다.

특히 임금 문제는 심각하다. 필요인력이나 공정에 대한 기업과 용역업체간 하도급 계약은 입찰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하청업체들이 치열한 가격경쟁을 벌인다. 결국 가장 싼 곳이 낙찰되기 때문에 임금도 최저 수준이 되는 것이다. 재하청이나 3차 하청까지 이뤄질 경우 임금은 더 열악해 진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의 50∼60%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과거에도 대기업 사내하청은 존재했으나 청소 등 생산외적 부문에서 이뤄졌고 숫자도 미미해 이들과 사측간의 갈등이나 노·노문제까지 야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IMF로 생산직 정리해고가 대거 발생하면서 사내하청이 생산부문으로 진입했고 한 공장 내에서 정규직의 4분의 1에 이를 만큼 양적 팽창이 이루어졌다.

법적 보호도 허술해 상당수의 하청 노동자가 부당노동행위로 피해를 보거나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균등처우에 대한 규정은 남녀, 국적, 신앙 등에 대해서는 차별금지를 규정하고 있지만 근로형태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처우개선책으로 민주노총은 직접고용보장을 위한 법개선과 불법파견 근절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재계는 기업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임금안정 등 정규직의 일정한 양보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국내 사내하청을 이대로 유지할 경우 파괴적인 형태의 갈등이 우려된다"며 "기업은 사내하청을 줄이고 노조는 비정규직과의 근로조건 격차를 좁히는 등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노사정위원회 이호근 전문위원은 "사내하청은 인건비 저하를 통한 경쟁력과 노동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으나 기업 소속감이나 충성도가 결여돼 제품의 질 저하를 초래할 수도 있다"며 "정부가 근로감독 강화와 법적 정비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진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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