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은 지난해 8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솔직히 말해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며칠 뒤 광복절 행사에 당직자를 보내고 자신은 인공기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화를 불태운 극우 냉전 단체들의 시청 앞 집회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나는 이 난(2003년 8월 26일자)에 최 대표의 말을 빗대서 "야당 대표 잘못 뽑았다"는 칼럼을 쓴 바 있다.이로부터 반 년이 지난 지금, 최 대표가 결국 사의를 표명하고 말았다. 최 대표는 '최틀러'라는 별명이 보여 주듯이, 강한 추진력을 가진 강성 보수주의자였지만 원칙주의자로 그 나름대로 평가를 받아 왔다. 또 노무현 정부의 측근 비리와 관련해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강력한 대 정부 투쟁을 주도해 왔다. 그러나 결국 대선 자금의 덫에 걸려 대표직을 내놓게 된 것이다.
사실 문제가 되고 있는 한나라당 부패 문제는 최 대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이회창, 서청원 체제 하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최 대표로서는 억울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당 대표로서 서청원 석방 결의안과 같은 법안 통과를 주도했거나 최소한 방관한 것, 그리고 자신이 이회창 전 총재와 함께 책임을 지겠다는 동반책임의 자세를 보여주지 않고 이 전 총재가 책임지라는 식의 자세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판 패착이었다.
얼마 전 소설가 이문열씨는 자신의 최근 행각과 관련해, '시대와의 불화'라는 표현을 썼다. 최 대표가 안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이 시대와의 불화였다. 즉 최 대표는 시대착오적인 냉전의식에서 변화한 시대의 흐름과 민심을 너무도 모른 채 착각 속에서 정치를 해 왔다. 광복절 집회 참가 에피소드부터, 뜬금없이 "나라를 구하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시작한 단식 농성, 서청원 석방 결의안, 이 전 총재 책임론 등이 그 예다.
특히 이 같은 착각의 정치는 대표 퇴진 기자회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최 대표는 뜬금없이 "친북, 반미 성향의 노무현 정권과 사회단체로 위장한 급진 좌파들이 합세해 이 나라의 건전 보수 세력을 붕괴시키려는 획책에 그야말로 혈안이 되어 있다"고 색깔론을 제기한 것이다. 또 "이번 총선은 한나라당만의 운명이 걸린 게 아니라 자유, 민주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선거"이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힘만으로 부족하니 한나라당에 사랑과 채찍, 힘과 용기를 달라"고 호소했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고 하지만 건전 보수 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한 친북 반미 정권과 급진 좌파의 획책이라니, 차떼기가 좌파의 음모라는 이야기인가? 오죽했으면 같은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까지도 최 대표가 "자신의 거취를 설명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것 같지만 적절치 못한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나섰겠는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최 대표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다. 즉 그의 주장대로 이번 총선은 한나라당의 운명만이 아니라 자유, 민주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선거이다. 그러나 최 대표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최 대표는 스스로 건전 보수 세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최 대표 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색깔론이나 내세우는 정치세력은 건전 보수 세력이 아니라 극우 냉전 세력에 불과하다. 그리고 극우 냉전주의는 자유와도, 민주와도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 자유, 민주 대한민국은 5공식 극우 파시즘이 아니라 선진국들처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말한다. 따라서 누가 다음 당 대표가 되든 한나라당이 최 대표처럼 시대착오적인 극우 냉전주의에 빠져 있는 한 한나라당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참패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 대한민국으로 나가는 길이다. 누가 당 대표가 되든 한나라당이 최 대표와 같은 극우 냉전주의와 착각의 정치를 벗어나지 않는 한, 한나라당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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