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1년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극심한 이념적 정체성의 혼란기로 평가된다.지난 1년 동안 노 대통령의 정책 방향은 '우향우(右向右)'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공약으로 내세웠던 자주외교 노선과 대북 평화번영정책, 친(親) 노동성향의 재벌규제 정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농도가 눈에 띄게 옅어졌다. 개혁 위에 개량주의와 보수의 색채가 덧칠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개혁적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보수 진영에선 "냉·온탕식 정책혼선만 거듭한다"는 비난을 샀다. "정책의 일관성도 없고, 국가경영 철학과 전략도 실종됐다"는 혹평도 받았다. 하지만 "현실의 한계를 헤쳐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방향 선회로 정권의 정체성과 연관짓는 건 무리"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시민단체들은 현 정권의 이념적 정체성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경실련 고계현 정책실장은 "현 정부는 이념적 정체성이 없다"며 "현실 유지와 개혁공약 가운데서 우왕좌왕하다 혼란만 야기했다"고 평가했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도 "정체성이 변한 것인지 원래 그랬는데 착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경제·사회복지·외교 정책에서 보수화 경향은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혼란은 상호 모순되는 정치·경제적 지향점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노 대통령은 경제적으로는 보수적 색채가 강한 신자유주의를, 정치적으로는 시민참여를 중시하는 진보성향의 자유주의를 채택해 근본적 자기 모순에 시달려 왔다"며 "선거 때의 자유주의 노선이 집권 후 신자유주의에 함몰되는 형국"이라고 분석했다.
확고한 국가경영 철학의 부족에서 원인을 찾는 시각도 많다. 김기식 실장은 "현 정권은 철학·이념·정책적 소신과 컨텐츠가 결여돼 있다"고 평했다. 민주당 김영환 상임중앙위원은 "노 대통령은 겉으론 진보적이지만 철학적 중심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때로는 감당 못할 급진론으로, 때론 포퓰리즘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반면 정체성 보다는 정치·외교적 전략 부재 탓이라는 견해도 있다. 최형익 한신대 교수는 "대미 외교정책의 혼선은 한반도 평화전략에 대한 구상 부족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개혁정책의 퇴조도 거대야당의 존재 등 현실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 뿐 정체성의 변화는 아니다"고 지적했다. 한상진 서울대 교수도 "노 정부의 뿌리가 변했다고 보기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대미관계 등에서 노선변화가 감지되긴 하지만 이념과 현실을 조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궤도수정"이라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정책위 의장은 "참모진과 조언그룹이 개혁진영에서, 보수를 망라한 전 진영으로 확대되면서 현실과의 균형추를 맞추게 된 결과"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기식 처장은 "변화무쌍한 노 대통령의 기질로 볼 때 총선 결과에 따라 예전으로 회귀할 수도 있다"고 내다 봤다. 다만 야당 등 보수진영과 이해집단의 공격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켜낼 내공이 쌓여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지적이다.
/배성규기자 vega@hk.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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