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이 공장과 일자리를 외국으로 옮기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조지 부시 미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하는 그레고리 맨큐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은 최근 해외 아웃소싱을 옹호하는 이 발언 때문에 정치권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대통령 최측근 인사의 현실인식이 이 모양이니 미국내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고 실업난이 악화하고 있다는 식의 비난이다. 올해 46세의 맨큐는 최단 기간내 하버드대 정교수에 오르고, 그가 쓴 경제학원론은 폴 새뮤엘슨 경제학원론의 50년 아성을 단숨에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는 걸출한 경제학자이다. 그런 만큼 그의 주장은 경제이론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는 얘기였지만, 대선을 눈앞에 두고 있는 정치인들에게는 유권자들의 표를 깎아먹는 위험한 발상일 뿐이었다. 권력을 건 정치논리 앞에는 아무리 훌륭한 경제논리도 힘을 잃는 사정은 미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눈치 없는 소신발언으로 화를 자초한 이 철부지 관리가 한국 관리들의 탁월한 정치감각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요즘 한국 관리들의 정치감각은 한층 빛을 발하고 있다. 정부 각 부처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총선용 정책을 쏟아내며 음으로 양으로 정치권력을 도울 길을 찾아 스스로 뛰고 있다. 꽁꽁 묶였던 규제들이 한꺼번에 풀리고, 각종 개발계획의 화려한 청사진이 연일 제시되는가 하면 구체적 실행방안이 뒷받침 되지 않은 일자리 창출 계획이 당장 가능한 일인양 발표된다. 골치 아프거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 다시 말해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정책들은 관리들의 책상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렸다. 새 정치를 내세운 집권세력이 과거 정권보다 더 노골적으로 총선에 개입하는 것도 문제지만, 정치권력을 견제하기는 커녕 오히려 나팔수로 앞장을 서고 나서는 관료사회의 도덕적 해이는 더욱 심각한 병이다.
이런 점에서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등장은 각별한 기대를 사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논리의 오염으로부터 경제를 어느 정도는 지켜낼 수 있을 것이란 바람이다. 그것은 이 부총리가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실전경험,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노무현 정권이 경제문제의 중요성을 절감한 시점에서, 코드를 강조하는 운동권 출신들이 아니라 그를 따르던 경제 관료들이 청와대에 포진해 있는 유리한 여건에서, 삼고초려(三苦草慮) 형식으로 한껏 몸값을 높여 스카우트 됐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충분히 조성돼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관가에서는 이 부총리가 역대 어느 경제부총리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실세가 될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빠른 법이다. 시장의 뜨거운 지지는 언제 비난의 화살로 돌변할지 모른다. 그의 발탁도 결국은 총선용 인사에 불과하다는 혹평도 적지 않다. 바라건대, 이미 2000년 총선 바람에 휘말려 7개월 만에 재경부 장관에서 물러난 아픈 상처가 있는 그가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길 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권의 이해를 초월해서 한국경제의 미래만을 내다보면서 소신 있게 일한다는 믿음을 시장에 주어야 한다. 아무리 정치권의 공격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맨큐 같은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배 정 근 부국장겸 경제부장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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